[쿠키 연예] 우공이산(愚公移山). 배우 박용하(33)의 일본 진출 스토리를 요약하는 사자성어다. 그는 아주 우연히 성공의 기회를 얻었다. 지난 2002년 방송된 KBS 드라마 ‘겨울연가’다. 하지만 박용하를 주목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독특한 미학적인 연출로 계절 연작 시리즈를 만든 윤석호 PD의 ‘가을동화’ 후속작, ‘젊은이의 양지’로 이름을 알려 ‘첫사랑’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용준과 최지우의 만남, 그 정도가 당시 ‘겨울연가’의 키워드였다. 어디에도 박용하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1994년 데뷔한 오랜 무명 시절을 겪고 있는 배우 정도로 평가됐다.
국내서 ‘겨울연가’가 평균 시청률을 23.1%를 기록하며 성공가도를 달릴 때도 박용하는 그저 조연에 불과했다. 오직 배용준과 최지우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건은 2004년 일본에서 터졌다. 일본 NHK에서 방송된 ‘겨울연가’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무뚝뚝한 일본 남성과 달리 로맨틱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준상(배용준 분)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은 일본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배용준은 ‘욘사마’, 최지우는 ‘지우히메’가 됐다. 그리고 또 한 명, 배용준의 연적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요나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냉정하면서도 순정을 바치는 상혁으로 박용하는 일본에 알려졌다.
‘겨울연가’에 출연한 배용준의 인기는 기무라 타쿠야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 연예계 역사상 비슷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상상을 초월했다. ‘욘사마’가 일본에 입국하면 도쿄 나리타와 하네다 공항은 수천 명의 팬들로 인상인해를 이뤘다. 일본 정부는 그를 국빈급으로 대우했다. ‘지우히메’도 마찬가지다. 배용준과 최지우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국내 배우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박용하는 조용히 일본 진출을 준비했다. 갓 데뷔한 신인 같은 낮은 자세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구사했다.
박용하는 ‘겨울연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일본 팬들에게 ‘겨울연가’를 계속 강조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은 앨범 발표였다. 신인 가수로 시장을 서서히 넓혀나가는 선택을 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구사가 필수였다. 박용하는 밤낮을 매달려 일본어 연습에 매진했다. 일본 연예주간지 한 관계자는 “박용하는 결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며 “오히려 팬들은 만날 때마다 조금 더 일본어가 능숙해지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좋아했다”고 평가했다. 소위 한탕주의 식으로 치고 빠지는 일부 한류 스타들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이른 시간에 나타났다. 2004년 11월 발표한 싱글 ‘가지 마세요’가 오리콘 차트 10위에 진입했다. 한국 남성 가수로 최초였다.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최지우 효과에 취한 국내 언론은 당황했다. 그저 드라마 인기를 등에 업은 ‘반짝’ 인기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박용하는 2005년 신인상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무려 4년 동안 일본 골든디스크 상을 수상했다. 국내서는 ‘겨울연가’로도 별다른 인지도 상승이 없었지만 이미 일본에서 박용하는 2004년부터 최고 인기가수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
일본 연예주간지 한 관계자는 가수 박용하가 짧은 기간 빠르게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그는 당시 공항에 입국할 때도 전혀 거창하지 않았다. 선글라스 착용도 하지 않았다”며 “팬들과 만나는 자리를 비롯해 공식 일정은 철저히 약속 시간을 지켰다. 대부분 1시간 이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는 예의바르고 겸손한 이미지가 만들졌다.
‘요나짱’의 위력은 갈수록 더해지기 시작했다. 박용하는 2005년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 음악의 심장부로 불리는 부도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2008~2009 일본 3개 도시에서 열린 투어 공연은 4만석이 매진됐다. 유료 티켓 수익으로만 30억원에 달하는 대형 공연이었다. 단순한 이벤트 형식의 공연이 아니라 일본 데뷔 5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행사에 모인 팬들은 열광했다. 가수 데뷔 초기 시달린 가창력 논란도 잦아들었다. 류시원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 가수라는 찬사가 일본 언론에서 먼저 등장했다.
박용하에게 올해는 상당히 중요한 해였다. 늘 자신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외강내약’ 이미지를 바꾸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인기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기울이려 했다. 영화 ‘작전’과 드라마 ‘남자 이야기’의 부진을 벗고자 절치부심하면서 일본에서 의욕적으로 새 앨범을 발표했다. 지난달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6월19일부터 9월4일까지 전국 투어에 나서기로 했다. 지난달 24일 이미 사이타마에서 콘서트도 가졌다.
그런 그가 지난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일 효고현 고베 콘서트를 불과 이틀 앞둔 상태였다. ‘요나짱’을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일본 팬들은 갑작스런 비보에 할 말을 잃었다. 국내 팬들이 자살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과 달리 일본 팬들은 ‘언제나 웃던 친구가 편히 쉬기를 바란다’, ‘조금 더 그를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뿐이었습니다’ 등의 위로가 대부분이다.
박용하와 생전 만난 적이 있다는 일본 연예주간지 한 관계자는 “일본에서 수많은 한류스타 중 단연 최고는 ‘욘사마’였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요나짱’은 많은 일본 팬들에게 가까운 거리에서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소박하고 겸손한 박용하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전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