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다…“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을 뿐”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다…“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을 뿐”

기사승인 2011-06-05 23:51:00

[쿠키 사회] 5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KT 본사 앞 인도에 400여권의 책들이 쌓였다. 책 더미 앞으론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10여m에 이르는 행렬을 만들었다. 무료로 책을 나눠준다는 소리에 솔깃해 지나가던 행인도 발걸음을 멈추고 대열에 합류했다.

이날 책을 나눠 준 것은 기업이나 사회단체가 홍보를 위해 마련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반값등록금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집회였다. 집회의 이름은 ‘책읽는 시위’. 책은 대학생들에게만 무료로 제공됐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위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던 폭력적인 시위 대신 학생들이 꺼내든 것은 전공 서적과 인문서였다.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책읽는 시위’는 오후 7시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촛불집회’ 2시간 전에 열렸다.

시위를 주체한 단체는 없었다. 트위터 모임인 ‘돈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당’ 회원들이 현장을 정리할 뿐이었다. '책읽는 시위' 소식을 들은 30~40대 인생 선배들은 후배들의 고충에 힘을 실어 주자며 자발적으로 힘을 보탰다. 방송인 김제동,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서울대 조국 교수 등이 책을 기증했다. 시위는 400여권의 책으로 시작했다.

오후 5시30분 본격적으로 책을 나눠주기 시작했고 한 시간 동안 200여명의 학생들이 책을 받았다. 그들은 현장을 떠나지 않고 KT 본사 앞에 놓인 카페의 테이블이나 계단에 자리를 잡은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요일 오후 태양빛을 받으며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촛불집회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학생 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책은 줄지 않았다. 주변 상황을 정리하던 트위터 모임의 회원이 한 마디 건넸다.

“30~40대 직장인 분들이 교보문고에서 적게는 2권 많게는 10여권씩 자비로 책을 사서 저희에게 주고 갔습니다. 400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800여권으로 늘어났어요. 현대판 오병이어죠.”

현장에 온 학생들과 시민들은 새로운 시위 문화가 자리를 잡을 때라는데 공감했다.

이 같은 시위 문화는 지난 1일 서울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서울대 법인화 추진 중단을 요구하며 행정관을 점거한 학생들은 시위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이자 점거한 행정관 복도 바닥에 앉아 책을 꺼내들었다. 총학생회도 나섰다. 시위 현장에 책상을 배치했고 학생회 본부엔 공부방을 따로 만들었다.

몇몇 교수들은 학생들의 사정을 배려해 직접 점거 현장을 찾아 강의도 했다.

모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여대생 최은주(23·가명)씨는 트위터에서 ‘책읽는 시위’ 정보를 본 뒤 새로운 시위 문화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고 했다.

최씨는 국립대라 다른 사립대에 비해 등록금이 120만~200만원 정도로 다른 대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그녀는 “과거 우리학교에서 동맹휴업을 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나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까 싶어서 왔다”고 말한 뒤 “서울대 ‘공부하는 시위’와 이번 ‘책읽는 시위’가 새로운 시위 문화로 확장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고 설명했다.

40대 직장인인 한 남성은 교보문고에서 책 3권을 산 뒤 현장을 찾았다.

그는 이날 시위 현장을 본 뒤 “기분이 좋다”고 평했다. 이어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이틀에 한번씩 시위에 나가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시위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학생들이 원하는 건 돈 걱정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책 읽는 시위’는 그들의 의지를 일반 시민들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제동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전날 폭력 진압을 시도하는 경찰들을 본 뒤 평화적으로 시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30, 40대 날라리 선배들이 '책읽는 시위'의 취지에 공감했고 책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도 ‘우린 싸우고 싶지 않다.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를 이번 시위를 통해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시위가 끝나고 남은 책은 200여권. 트위터 모인의 회원은 6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책읽는 시위'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트위터, 새로운 문화를 이끌다=새로운 시위 문화를 바꾸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건 트위터였다.

‘책읽는 시위’ 아이디어는 전날 집회 후 모임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우연치 않게 나왔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곧바로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당’이란 트위터 당(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에 동석한 김제동 등 인생 선배들도 찬성했다. 이후 ‘책읽는 시위’는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집회에 참석한 학생이나 책을 기증한 사람들 대부분이 트위터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조국 교수, 정재승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의 ‘공부하는 시위’ 역시 트위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본부 설계도를 올렸고 사진을 띄웠다. 글·사진=국민일보 쿠키뉴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서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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