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차범근’이 돌아왔다… 다시 뛰는 박은선

‘여자 차범근’이 돌아왔다… 다시 뛰는 박은선

기사승인 2013-04-23 20:14:01


[쿠키 스포츠] 놀랍다. 현묘한 몸놀림, 치열한 몸싸움, 폭발적인 드리블, 빠른 스피드, 강력한 슈팅 그리고 동료애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박은선(27·서울시청). 한국 여자축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거 참, 이제 정신을 차렸나 봅니다.” 14년을 따뜻하게 제자를 지켜보고 있는 스승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은 허허 웃더니 말했다.

키 1m80, 몸무게 74㎏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박은선은 23일 현재 IBK기업은행 2013 WK리그 6경기에 출장해 11골을 터뜨려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3골에 그친 2위 그룹과는 비교가 안 된다. 박은선은 22일 강원도 화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북 체육진흥공단(KSPO)과의 경기에서 4골을 몰아쳐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잊혀져 가던 그 ‘축구 여왕’이 추억이 깃든 그라운드에서 화려한 부활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박은선은 어린 시절부터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대형 스트라이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03년 미국여자월드컵 진출권이 걸린 아시아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7골을 터뜨렸다. 모두 “여자 차범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한국 여자축구는 박은선의 맹활약 덕분에 사상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이듬해 U-20(20세 이하)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에선 득점왕(8골)에 오르며 한국에 우승 트로피를 안기기도 했다.

박은선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현 동산정보산업고)에서 실업으로 직행했다. 그러자 여자축구연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간 뛰어야 한다’는 선수선발 세칙(3조3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3개 대회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박은선은 2005년 한 해를 고스란히 날렸다. 이후 부상과 대표팀 무단이탈, 개인사 등으로 한동안 축구계를 떠났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던 박은선 때문에 서 감독만큼 속을 태운 이가 또 있을까. 서 감독은 박은선이 팀을 이탈했다 돌아올 때마다 두 팔을 벌려 품어 줬다. “은선이 같은 걸출한 스트라이커를 내치는 건 한국 여자축구의 큰 손실입니다.”

박은선은 2010년 2월 아버지(박순권씨)가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방황했다. 팀에 복귀한 뒤 또 이탈한 것. 일년 넘게 허송세월했다. 힘들어 몸부림칠 때마다 곁에서 다독여 주던 아버지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버지가 투병하며 남긴 엄청난 병원비는 모두 가장인 박은선의 몫으로 남았다. 그놈의 빚은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개인파산신청을 했다. 박은선은 여전히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만든 집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방황할 수 없었다. 박은선은 2011년 11월 말 다시 축구화 끈을 동여매고 원 소속팀인 서울시청으로 복귀했다. 생활고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상처받은 자존심이었다. 박은선은 지난 3월 키프로스에서 열린 2013 키프로스컵대회에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표팀 이탈을 밥 먹듯이 해도 대한축구협회는 매번 그에게 태극마크를 안겼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습니다. 과거 대표팀 코칭스태프와의 갈등 때문에 팀에서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징계도 받았지만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은 여전했거든요. 그런데 탈락했으니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지요.” 서 감독의 말이다.


“은선이는 스타 의식이 아주 강해요. 그것 때문에 선수 생활이 평탄치 않았어요. 갑자기 또 과도한 관심을 받으면 어디로 튈지 몰라요. 당분간 팬들과 언론이 잠자코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 감독은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제자의 변한 모습에 뿌듯함을 감추진 않았다. “요즘 은선이가 팀플레이에 녹아들고 있어요. 왜 동료들과 함께 축구를 해야 하는지 깨달은 거지요. 요즘 플레이를 보면 동료들을 활용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무단이탈 없이 17개월째 숙소 생활을 할 정도로 완전히 달라진 박은선은 요즘 경기 때나 훈련 중 동료가 쓰러지면 바로 달려간다. 공이 옆줄 밖으로 나가면 누구보다 먼저 가서 주워 온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가족과 동료를 가슴에 품는 것. ‘탕아’는 이제 이것이 골을 터뜨리는 슈팅보다 더 고급 기술임을 알아 가고 있는 듯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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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기자
tae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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