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21일 창원지검의 스타크래프트2 승부조작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승현·정우용의 사례는 지난해 10월 ‘프라임팀’ 중심의 승부조작과는 별개의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이번 범죄는 국내 e스포츠계에서 발생한 3, 4번째 승부조작 사건인 셈이다.

특히 최근 세계챔피언 자리에까지 오른 선수가 승부조작을 자행한 것에서 과거 ‘본좌’로 통했던 마재윤의 승부조작 사건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근래 산업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던 e스포츠의 존립기반을 뒤흔들만한 사건이라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1대1 경기, 승부조작에 취약한 구조

이번 사건 역시 브로커가 있었지만 승부조작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이 핵심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1대1 대결로 치러지는 e스포츠 종목의 경우 승부조작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개인의 결심만으로도 경기 내용을 완전히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대체로 어리기 때문에, 프로정신에 있어서 충분한 의식 함양이 이뤄지지 못한 것도 허점으로 부각된다.

창원지검에 따르면 이승현 사례의 경우 선수 1명, 브로커 4명, 조작을 대가로 현금을 제공한 전주 2명, 도박 베팅 담당 직원 1명이 사건에 연관됐다. 정우용의 경우 선수 1명, 전주 2명이 연관됐다.

눈여겨 볼 점은, 두 사례 모두 선수 1명이 조작에 가담하고도 경기가 완벽히 날조됐다는 사실이다. 팬으로 둔갑한 브로커들은 이승현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승부조작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후 이승현은 2경기에서 고의 패배함으로서 7000만원을 챙겼다. 정우용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한 브로커에게 넘어가 1경기에서 져주는 대가로 3000만원을 받았다.

수사가 있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결심이 고스란히 승부조작으로 이어진 셈이다.

창원지검은 “전주나 브로커 등이 차명계좌를 사용해 은밀하게 진행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휴대전화 분석, 계좌추적 등 수사를 통해 승부조작 혐의를 밝혀냈다”고 전했다.

성장세에 비해 초라한 ‘정신 인프라’

국제적으로 다양한 종목의 e스포츠 대회가 열리고 있지만, 상위 랭킹에 한국 선수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 가장 큰 규모로 국제대회를 개최 중인 리그 오브 레전드와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한국은 지난 몇 년간 1위 자리를 거의 독식했다. “축구는 브라질, 게임은 한국”이란 말이 세계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e스포츠 종주국으로서 한국의 위치를 확고하다.

하지만 이런 위상과 별개로 국내 게임 산업에 대한 전방위적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등은 게임을 마약과 유사한 선상에 올려놓고 이를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가하면, 국방부는 게임방송의 생활관 송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스타2 세계대회에서 ‘셧다운’ 탓에 기권패를 해야 했던 한 청소년의 이야기는 이미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부정적 시선은 투자심리에 악영향을 끼친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팀으로 미증유의 성적을 이어가고 있는 SKT의 한 관계자는 e스포츠 토론회에서 “지난해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우승하고도 투자가 거의 없었다”며, “이것이 (e스포츠를 바라보는) 국내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승부조작 수사결과에 대해 창원지검은 “국내 e스포츠에 관한 물적 인프라 구축 외에도, 이번 수사를 통해 승부조작이 만연한 사실이 확인된다”며 “협회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e스포츠 승부조작을 내부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불법베팅은 엄연히 사회적 문제이자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마이너 내지는 지하세계로 여겨지는 e스포츠의 위상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음지의 거래’가 횡행할 건 자명하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공개한 예산자료에 따르면 올해 e스포츠 분야에 편성된 예산은 26억4200만원으로 지난해 대비 10억4200만원(65%) 상승했다. e스포츠 산업의 가능성을 고려한 증액 편성이라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예산안의 면면을 살펴보면 몸집을 불리는 항목이 대부분이며, 선수 소양이나 내실을 다지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기획재정부에 관련 예산을 신청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문체부에 따르면 올해 e스포츠 예산안 중 ‘e스포츠 산업 종사자 교육 프로그램 운영’ 항목으로 5억원을 기재부에 신청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 사업 예산은 선수 교양교육, 은퇴 선수 재교육 지원 등을 목적으로 책정한 것으로, 승부조작 예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예산 퇴짜가 지난해 10월경 불거진 승부조작 사건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해도, 앞서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한 적 있는 종목의 예방 예산을 거부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일각에서는 e스포츠의 산업적 가치만이 부각되는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질타한다.

e스포츠는 엄연한 스포츠, 그 전제로 대책 세워야

미국, 중국, 유럽에선 e스포츠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지속가능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최고 권위의 스포츠 전문방송사인 ESPN은 홈페이지 섹션에 ‘e스포츠’를 추가했고, 기업과 스포츠 스타들은 e스포츠팀 육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경우 어마어마한 자본의 투자로 각종 e스포츠 대회와 팀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유럽은 이미 수년 전부터 e스포츠 팀 육성을 체계화했다. 지난 2년간 미국, 유럽, 북미로 진출한 종목불문 한국 프로게이머는 수십명에 이른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선수들이 프로의식을 갖는 데 크나큰 걸림돌이 된다. 프로게이머 이승현의 경우 세계대회 챔피언 출신이다. 그런 그가 승부조작에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첫째 이유로 프로게이머로서의 자부심 부족이 꼽힌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을 좀 이용하면 어때”라는 심리가 투영됐을지 모른다는 거다.

e스포츠는 엄연히 대한체육회 가맹을 추진 중인 스포츠 종목이다. 15년을 훌쩍 넘긴 한국 e스포츠의 발전사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산이자 능력이다. 이를 전제로 현재 당면한 과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승부조작은 한 개인이나 특정 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다. daniel@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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