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 소년’이 ‘글로벌 환경리더’로-
- 전교 꼴찌에서 단숨에 전교 1등으로-
- 민주화 투쟁시기에는 민주화 핵심전략가로-
- 기후변화 최대피해국인 몽골과 미얀마를 푸르게-
- 유엔, 푸른아시아 모델을 대안으로 권고-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 중인 몽골에 나무를 심는 푸른 아시아 오기출 상임이사(58·이하 오 이사)를 만났다. 오 이사는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심는 것입니다”며 말을 꺼냈다.
“인류는 매년 320억 톤 가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약 490억 톤의 온실가스를 하늘에 버리고 있습니다. 이는 서울 청계천에 하루 65,000톤의 물이 흐르는데 청계천의 약 2,060년 동안 흘러온 물의 총합입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약 1,350년 전 즉 신라의 삼국통일때부터 흘러온 청계천의 물만큼의 환경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이렇게 가면 북극이 녹아내리고 혹한과 폭염, 농산물 흉작이 일상화되면서 영화처럼 인류멸망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인류는 핵무기보다 기후변화로 멸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인류는 지금보다 이산화탄소를 80퍼센트 줄여야한다.” 시작부터 기자의 머리가 무거워졌다.
전교 꼴찌가 단숨에 전교 1등으로
오 이사는 1961년 경상남도 산청의 산골에서 5남 1녀의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산골소년 오기출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먼 친척이 운영하는 부산의 고물상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소년 오기출은 학교 다니는 날보다 고물상에서 고물을 정리하며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에 가도 담임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기성회비를 가져오라며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이래저래 졸업 때까지 출석일수가 100일도 채 안 되었다. 그래도 졸업은 했다. 운 좋게 초등학교 졸업장은 받아들었지만 생활기록부에 적힌 성적은 전교 꼴찌였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못하는 아이인가? 만약 내가 전교 일등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 그동안 고물상의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파지들이 보물로 다가왔다. 오 이사는 그 속에서 필요한 헌책과 참고서, 신문을 골라냈다. 특히 참고서와 신문은 그에게 공부방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과외선생님이었다. 고물상에 딸린 방은 하나였다. 좁은 방에서 8명의 식구가 먹고 자는데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책을 펴서 늦은 밤까지 공부에 열중했다. 제발 불 좀 끄라는 식구들의 성화와 미안함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 때 '형설지공'이 무엇인지 알았다. 밥값을 하라며 친척아저씨는 학교도 잘 안보내줬지만 결국 전교 일등의 꿈은 고물상이 아니었다면 실현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입학 후 처음 한 달은 그에게 정말 견디기 힘든 인내의 시간이었다. 고물상 소년의 몸에서는 당연히 냄새가 났고 얼굴과 옷은 때에 절어있었다. 체육선생은 용의검사 시 팬티만 입혀 세워 놓았다. 구질구질한 그를 좋아할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공부에 필요한 지능과 집중력, 뚝심까지 겸비한 그는 이를 묵묵히 감내하며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일학기 첫 시험에서 당당히 전교 일등을 차지했다.
전교 꼴지 졸업생이 단 몇 달 만에 전교 일등이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공부로 우뚝 선 그에게 주변의 대접은 틀려졌다. 놀림의 대상에서 어느새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집에서는 공부 할 여건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밤12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경비아저씨는 연습장을 가졌다 주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주면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친구들은 어려운 문제를 그에게 들고 왔다. 산청의 가족도 친척의 고물상을 인수하면서 부산으로 이사 왔다.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일등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 박사 오기출에게 사춘기가 왔다. 공부에 머리가 깬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국·영·수 등 주요과목의 3년 공부를 일찌감치 마쳤다. 오 이사는 2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심하게 겪는다. 왜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하는지 그에게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무조건 공부만 강요했다. 오 이사는 방황의 시기를 거쳐 재수 끝에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결국 그는 촌놈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라며 경제학과 교수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1981년 1학년 2학기 때 친한 친구가 데모를 하면서 강제징집을 당하게 되고 친구가 맡고 있던 농촌봉사활동(농활)을 대신 맡아하면서 오 이사는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전두환 군부 독재, 한국경제의 문제점과 사회 변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정체성 문제가 자연스럽게 정리되면서 인생의 방향도 정확한 푯대가 세워졌다.
가난한 노동자가 고통 받지 않는 사회 만들겠다!
그 무렵 어머니는 아들의 뒷받침을 위해 상경했다. 어머니는 구로공단 내 공장에 근무하면서 한 달의 절반은 철야를 했다. 밤새워 일하고 아침 7시에 퇴근해서 아들 밥을 차려 주고 다시 출근 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무리해서 쓰러졌다. 어머니는 집안의 기둥인 오 이사가 대기업에 취직해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 굳게 믿었다.
축 쳐진 어머니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뛰면서 그는 어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어머니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고통 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 가난이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앞장 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오 이사는 이후 순수 학생운동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어머니와 가족이 소망했던 탄탄대로의 대기업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선택한 오 이사는 30대 중반까지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 정책실에서 핵심 이론가로 활동했다. 감시와 고통, 고문과 인내의 시절을 민주주의와 사람에 대한 희망으로 살았다. 하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 경찰의 감시가 없어지고 사회가 변했다. 90년대 중반 들어 ‘운동권’이 해체되고 많은 선배들은 정치권으로 떠났다. 일부는 의원 보좌관을 하거나 사업가로 변신했다. 자신도 정치권에서 손을 내밀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던 후배들 생각에 혼자 남아 96년까지 노동운동을 했다. 오 이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감정과 남북통일, 재벌의 문제 등 3개의 과제가 늘 풀고 싶은 어려운 숙제였다.
지역의 안경을 벗고 인류라는 프리즘으로
우리 사회의 현안에서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오 이사는 그 무렵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던 PC통신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꾼다. ‘현재의 내 능력으로 이 땅에서 할 일은 없다.’고 판단한 오 이사는 한국이라는 지역의 안경을 벗고 인류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나라 밖 세상, 인류는 어떤 현안을 갖고 있는가” 독학을 하면서 자료를 찾고 연구하면서 ‘인류의 아젠다’를 찾아 나섰다. 인터넷을 통해 식량·빈곤 문제를 다루는 미국·유럽·일본 등의 엔지오(NGO)나 전문기관들의 팩스번호를 알아내 자신이 알고 싶은 현안들을 정리해 무조건 보냈다.
그는 1998년 1월 '한국휴먼네트워크'를 설립해 아시아의 시민사회단체와 교류를 시작했다. IMF 직격탄을 맞은 때라 국제회의가 쉽지 않았다. 외유내강의 그는 어렵게 한국, 일본, 중국, 몽골, 대만이 참여한 ‘동아시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을 성사시켰다. 아시아의 미래는 인류 아젠다의 축소판이었다.
인류 미래의 축소판이 한국이라는 것도 심포지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역감정, 통일, 재벌 이라는 우물 안 문제에서 ‘기후변화’를 비롯해 ‘금융’, ‘빈곤’과 ‘식량’ 그리고 ‘성평등’ 문제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시각이 확장되었다. 두 번째 열린 1999년도 일본회의에서는 “지구공공재의 위기 즉 공기, 환경, 인권 상황에 따라 시민들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지구공공재의 위기는 곧 기후위기, 금융위기와 직결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지구공공재의 위기에 대응한 실천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무(無)에서 시작한 일이 3년 만에 아시아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뜻을 세우니 길이 열렸다. 몽골이 기후 변화로 난민이 발생하고 전국토의 90%가 사막화의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UNDP(유엔개발계획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와 일본은 몽골의 기후변화에 대한 자료를 이미 많이 갖고 있었다. 오 이사는 공동실천을 제안했고 한국, 일본, 몽골이 함께 조사에 나섰다.
2000년 8월에는 맨몸으로 몽골을 찾았다.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사막화로 풀이 사라지고 물도 마르자 목축을 하던 유목민들은 낯선 도시로 떠밀려가 환경 난민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사막화는 심각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몽골 당국은 돈도 없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몽골은 기후변화의 나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 이사는 여기서 성공하면 다른 곳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답을 찾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2000년대 들어 황사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환경부와 기상청 등의 요청으로 몽골의 사막화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조림사업과 환경난민 자립사업, 에코투어 등 구체적인 현장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에는 지금의 ‘푸른아시아’로 명칭을 변경했다. 6년 전부터는 미얀마에도 진출해 중부건조지역 사막화 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환경 분야의 노벨상 ‘생명의 토지상’ 수상
2014년 푸른아시아는 환경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생명의 토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푸른아시아를 통해 지난 15년간 몽골의 황사 발원지 6곳에서 주민자립형 조림사업으로 지속가능한 생태환경을 정착시킴으로써 전 세계 사막화 지역에 희망을 심어준 공로였다.
UN이 생명의 토지상을 푸른아시아에 준 것은 단순히 나무를 많이 심어서가 아니라 주민역량개발을 통해 사람의 삶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가장 극단적 지역에서 만들어진 성공사례로, 기후변화로 고통 받는 각 지역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이기도 했다.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는 국가들은 협력해야 합니다. 수탈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체계적 협력이 필요하다.”면서 “국제적 지원 시스템과 결합해 안정적인 생산과 판매를 통해 성장의 열매를 나누어야 한다.”고 오 이사는 강조한다.
-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천개의 복이 온다-
1977년 케냐에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전국에 걸쳐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환경운동가 왕가리마타이는 200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숲에 불이 나면 모든 동물은 도망갑니다. 그런데 달아나지 않고 숲을 지키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벌새인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새는 숲에 불이 나면 개울가에서 그 작은 부리로 물을 머금고 와서는 불붙은 나무 위에 뿌립니다. 숲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큰 불에 비하면 벌새의 이런 행동이 하찮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벌새에게서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0억 인류가 벌새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평생 나무 10그루를 심는다면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앞으로도 몽골·미얀마 등 아시아에 10억 그루 나무를 심어 황사 발원지를 막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그러면 2만㎢의 생태복원이 이뤄져 그 10배 정도 이상의 지역에서 모래먼지 폭풍이 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오 이사는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 일과 더불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함께 복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후변화와 사막화로 고통 받고 있는 지구촌 160개 나라가 이 같은 푸른아시아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푸른아시아의 활동가들과 주민들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만들어가는 공동체 모델은 지금도 변화하며 발전해나가는 중이다.
오 이사는 “공동체(community)의 어원은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함께 하는 것’이다. 벌새 한 마리는 미약하지만 수백만, 수천만이 모이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연대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면 막강한 힘이 된다.”면서 “기후변화는 더 이상 미래의 과제가 아닌 지구 공동체가 당면한 절박한 현실이다. 민간 리더들이 먼저 시작하되 국가 차원에서 결합해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이 답”이라고 힘을 주었다.
글=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사진=왕고섶 사진가 ·
사진제공=푸른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