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여섯 번재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여섯 번재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23 12:40:00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까지 벌써 세 번째 로마에 도착했지만, 겨우 변죽만 울렸을 뿐 로마에 입성했다고 할 수는 없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마침내 포르타 델 포폴로에 도착해서야 드디어 내가 로마에 도착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라고 적었다.

이날 아침부터 오후 3시 반까지 로마 시내와 바티칸을 돌아보는 숨 가쁜 일정이라서 7시에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주로 옥외에 있는 유물들을 볼 예정이라서 날씨가 중요했는데, 오전이 14도로 다소 쌀쌀했지만 맑아서 참 다행이다. 여행에서는 날씨가 크게 한 몫을 한다. 로마 시내를 버스로 움직일 수 없는데다가, 걸어서 다닐 시간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일인당 50유로를 내고 벤츠를 세내어 움직이기로 했다.

숙소를 나선 버스는 일단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stantino)과 콜로세움(Colosseo)이 있는 산 그레고리오 거리(Via Di San Gregorio)에서 일행을 내려줬다. 왼쪽으로 팔라티노 언덕이 있고, 그 아래 길가에 붉은색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가 있다.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이다.

이는 아쿠아 아니오 베투스(Aqua Anio Vetus), 아쿠아 아니오 노부스(Aqua Anio Novus), 아쿠아 마르키아(Aqua Marcia)와 함께 로마의 4대 수로였다. 아쿠아 클라우디아는 아쿠아 아니오 노부스와 함께 서기 38년 칼리쿨라(Caligula)에 의해 건설이 시작돼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인 52년에 완공됐다.

캐룰레우스(Caeruleus)와 쿠르티우스(Curtius)를 수원으로 하는 클라우디아 수로는 총길이가 69㎞에 달했고 대부분 지하에 건설됐다. 초당 약 2.3㎡의 물이 흘러 하루 19만㎥의 물을 공급했다. 네로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카엘리아 언덕까지 확장했고, 도미티아누스는 다시 팔라티나 언덕까지 확장하여 로마의 14개 지구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했다. 클라우디아 수도를 건설할 때는 포졸라나 모르타르를 사용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구조와 외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산 그레고리오거리의 끝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서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 사이에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높이 21m, 폭 25.9m, 두께 7.4m로 벽돌을 쌓고 대리석으로 외장을 마감한 세 개의 아치로 구성됐다. 중앙 아치의 통로는 폭 6.50m, 높이 11.45m이다.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북서쪽을 흐르는 테베레강의 밀비오 다리(Ponte Milvio)에서 벌어진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전투에서 거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이 헌정한 것으로 황제 즉위 10년에 즈음한 315년 완공됐다. 티투스(Titus)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ttimio Severo) 개선문 등과 함께 로마에 남아있는 세 개의 개선문 가운데 하나다. 건축학적 구조는 로마 포럼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개선문과 흡사하다.

개선문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들은 선대에 만들어진 것들을 재활용하고 있다. 특히 정면과 측면의 것들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치의 위쪽 지붕을 장식하는 다락(attic)에는 황제의 업적을 표현한 부조들을 새겼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찬양하는 장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원정을 끝내고 로마로 귀환하는 장면, 황제가 독일 죄수를 심문하는 장면 등이다. 중앙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진 비문에 청동으로 된 문자가 박혀 있었다. 지금은 청동문자는 사라졌지만, 글자가 박혀있는 자리는 선명하게 남아있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IMP (eratori) · CAES (ari) · FL (avio) · CONSTANTINO · MAXIMO · P (io) · F (elici) · AVGUSTO · S (enatus) · P (opulus) · Q (ue) · R · QVOD · INSTINCTV · DIVINITATIS · MENTIS · MAGNITVDINE · CVM · EXERCITV · SVO · TAM · DE · TYRANNO · QVAM · DE · OMNI · EIVS · FACTIONE · VNO · TEMPORE · IVSTIS · REMPVBLICAM · VLTVS · EST · ARMIS · ARCVM · TRIVMPHIS · INSIGNEM · DICAVIT”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황제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위대하고 경건하고 축복받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신성한 영감과 위대한 마음을 가진 그는 그의 군대와 무기만으로 폭군으로부터 나라와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하였기에, 원로원과 로마 사람들은 승리로 장식된 이 개선문을 헌정합니다.”

이 가운데 ‘instinctu divinitatis(신의 영감을 받은)이라는 단어가 쟁점이 됐는데, 이 부분은 종교의 통합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잘 알려진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공표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을 뿐 아니라 압류된 교회재산을 돌려줬다. 또한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 있다. 이런 변화는 밀비오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를 암시하는 십자가를 보았다는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지나 산 그레고리오거리의 반대쪽으로 돌아가면 개선문, 콜로세움 그리고 비너스와 로마 사원 사이에 원뿔 모양의 분수대가 있다. 메타 수단(Meta Sudans)이다. 고대 로마의 I, III, IV, X 등 4개 지구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메타 수단은 플라 비우스 황제가 콜로세움을 완공한 뒤 서기 89년에서 96년 사이에 세웠다. 

‘전환점’이라는 의미의 메타는 2륜 경기장(circus)의 양쪽 끝에 세워진 원뿔형 구조물이었다. 메타 수단 역시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원뿔형 분수대로 보인다. 수단은 ‘땀을 흘린다’는 의미다. 로마군의 개선행렬은 팔라티나 언덕 동쪽의 개선로(via Triumphalis)를 따라오다 메타 수단에서 사크라 도로(via Sacra)로 좌회전하여 로만 포럼(Forum Romanum)으로 들어갔다. 

높이가 17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메타 수단은 벽돌과 콘크리트로 짓고 대리석으로 겉을 마무리했다. 윗부분에 있는 구멍을 통해 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분수대 주변에는 폭 16m에 깊이 1.4m인 수조가 있었다. 메타 수단은 중세 무렵 손상되기 시작해서 19세기 말에는 벽돌을 쌓은 원추형 벽돌더미만 남았다. 1936년 무솔리니 집권시에 콜로세움 부근의 교통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제거하고 표지판을 남겨뒀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지나 왼쪽, 그러니까 콜로세움의 반대편으로 창살이 달린 아치형 문이 여러 개 달려있는 벽돌로 된 건축물 위로 비죽하니 올라와 있는 건물이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Templum Veneris et Romae)이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큰 사원이었을 이 신전은 로마 포럼의 동쪽 가장자리와 콜로세움 사이에 있는 벨리아 언덕에 지어 행운을 가져오는 비너스(Venus Felix)와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에게 헌정됐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신전에 미묘한 의미를 부여했다. 로마여신과 함께 헌정된 비너스 여신은 사랑을 대표하는데, 사랑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철자를 거꾸로 배열하면 로마(ROMA)가 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121년 건설을 시작해 135년에 낙성식을 거행했지만 완공은 141년 피우스 황제 시절에 마무리됐다. 길이 145m, 폭 100m의 기단에 높이 295m의 조각상을 세웠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뜰은 110m 길이에 폭은 53m에 달했다. 

사원은 등을 대고 있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됐는데, 각각에는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로마의 여신 조각상을 모셨다. 로마 여신의 방은 로마 포럼을 향했고, 비너스 여신은 콜로세움을 향했다. 각 방 입구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신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10개, 남쪽과 북쪽에 각각 18개를 세웠다. 기둥의 폭은 1.8m로 매우 웅장했다.

307년 화재로 손상돼 복원이 이뤄졌고, 9세기 초에 심한 지진으로 파괴됐다. 850년 무렵 교황 레오4세는 이고셍 산타 마리아 노바 교회를 짓도록 했고, 1612년에는 대대적인 재건축과 함께 로마여신의 방을 종탑으로 변경해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 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 왼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들어가면 티투스의 개선문(Arco di Tito)이 서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포위공격을 포함한 티투스 황제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티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 위에 오른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서기 82년에 세운 것이다. 티투스의 예루살렘 승리는 결국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가져왔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킨 까닭에 이때의 승리를 계기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해 각지에 흩어져 살도록 한 것이다. 2000년 가까이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를 전전하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한 유대인들의 고난,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한편 티투스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비롯해 16세기 이후에 세워진 많은 개선문의 모형이 됐다.

티투스 개선문의 높이는 15.4m이고, 폭은 13.5m이며, 두께는 4.75m이다. 개선문 안에 만든 아치의 높이는 8.3m이고, 너비는 5.36m이다. 아치의 꼭대기와 기둥, 지붕 사이의 삼각형 공간(spandrel)에는 날개달린 여성을 새겨 승리를 표현했다. 좌우 스판드럴 사이의 관석(keystones)은 동쪽에는 여성을 서쪽에는 남성을 각각 새겼다. 

아치의 천정부분에는 신격화한 티투스의 행적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한 4각 패널들로 장식했다. 남쪽 패널에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가져온 전리품이 묘사됐다. 가지가 달린 황금촛대, 제단에서 가져온 부삽, 성찬대, 황금 트럼펫을 부는 개선행렬 등이 깊은 부조로 새겨졌다. 북쪽 패널에는 여러 신령과 관리에 의해 인도되는 개선장군 티투스의 모습이 묘사됐다. 헬멧을 쓴 아마존의 전사 발로루(Valour)가 티투스의 4륜 전차를 몰고 있다. 신과 인간을 나란히 배치하는 처음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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