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25세‧여성)씨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온라인 게임을 즐겼다가 되레 기분이 상했다. 실력이 변변찮다는 이유로 팀원에게 욕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게임하는 것을 보니 답이 나온다”는 등 A씨는 게임이 진행되는 내내 실력과 무관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전국 10~64세 6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2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게임 이용률은 74.4%로 작년 71.3%보다 3.1%p 상승했다. 성별에 따른 이용률은 남성 75.3%, 여성 73.4%로 남녀 모두 높은 확률로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밝혀졌다. 젊은 남성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게임은 이제 여성들의 주된 취미 생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성 게이머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패배의 원흉’ 혹은 ‘분란을 조장’하는 이로 여겨진다. 여성들은 게임 속에서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길 꺼린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부족한 실력의 근거처럼 통하기 때문이다.
실력의 잣대는 유독 여성들에게 가혹하게 작용한다. 콘진원 조사에 따르면 게임 내에서 성차별 및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한 1048명 중 41.3%의 여성이 3회 이상 성차별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남성은 34.3%였다.
여성 최(26세·서울)씨는 10대 시절부터 게임을 즐겼다.
그는 현재 ‘리그 오브 레전드(LoL)’를 비롯해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최 씨는 게임을 할 때 자신의 성별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 “게임을 할 때 여성인 것을 밝혀서 좋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여자라는 것이 알려졌을 경우) 상대로부터 게임 친구를 하자고 하거나, ‘혜지’는 혼자 게임을 하지 말아 달라는 말들이 나온다”고 푸념했다. 혜지는 남자 친구와 게임을 플레이 하는 숙련도 낮은 여성 게이머를 지칭하는 말로, LoL 내에서 주로 여성 게이머를 비하하는 속어로 통한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에 지친 그는 게임 속에서 남자로 살기로 했다. “‘20xx년 제대’, ‘제x포병여단’ 등 군대용어를 사용해 일부러 남성적인 닉네임을 만들까 고민한 적도 있다. 현재는 누가 보더라도 남성인 이름을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음성 대화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집이라 마이크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며 자신만의 대응책을 덧붙였다.
최 씨는 “이전에 한 게임 길드에 가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성은 분란을 조장하기 때문에 가입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다.
남성 게이머 윤(30세·서울)씨는 게임에서 여성으로 오인 받아 욕설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여자 친구와 함께 게임을 즐기던 그는 팀원의 무리한 플레이로 인해 사망하자 채팅창에 “히잉, 억울해”라는 문구를 기입했다. 그러자 팀원들은 “너네 여자냐”라며 여성 비하 발언을 꺼냈다. 윤 씨는 “우리가 못한 것은 맞다. 그런데 해당 게임은 모두 못했는데 여성인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패배의 책임이 우리에게 모두 전가됐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여성 게이머가 과도한 비난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기존 게임 생태계의 기준점이 남성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은 PC방과 오락실 문화 등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통했다.
장민지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주류인 남성 게이머들에게 있어 게임 내 여성의 존재는 하나의 ‘예외적인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일부 여성향 게임을 제외하고 그동안 대중적인 게임의 주류는 남성이었다.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게임이라는 영역에서는 남성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남성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게이머들에게 있어 여성 게이머의 존재는 하나의 예외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은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그 원인으로 짚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비하는 주로 게임에서 지거나 성과가 저조할 때 나타난다. 누군가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경우, 소수자가 지목되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국내 게임 다수는 여성과 관련된 많은 금칙어를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성(性)적인 단어다. 게임 내에서 성차별적 언어 사용이 만연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게임 오버워치 안에서 ‘엄마’와 ‘어머니’는 금칙어로 인식된다. 해당 금칙어를 게임 내에서 사용하면 별표(*) 이모티콘으로 대체된다. ‘아빠’와 ‘아버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비하의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유독 여성과 관련된 단어 중 금칙어가 많은 까닭은, 게임사가 해당 단어들이 상대방을 비난할 용도로 사용된 사례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게임사들은 이용자간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여성 비하와 관련한 언어들을 분류, 금칙어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금칙어 기준은 게임사마다 제각각이다. 다소 엄격하게 금칙어를 선정하고 있는 국내 한 게임사 관계자는 “기존 단어의 의미가 불건전하지 않더라도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단어라면 금칙어로 선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금칙어는 분쟁 발생이나 타인 비방 등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소 보수적인 입장에서 금칙어를 설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게임사는 게이머의 민원과 더불어 커뮤니티 동향을 살피는 팀을 구성해 금칙어를 선정하고 있다. 해당 게임사는 “커뮤니티 동향을 파악하는 팀이 있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단어는 내부 판단 후 금칙어로 선정한다. 민원이 들어올 경우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지 모니터링 후 금칙어 여부를 결정한다. 대부분의 비하 용어는 금칙어로 설정되어 있다”고 밝혔다.
성차별과 성희롱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금칙어 선정이 과도하면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도 영향을 미쳐 이용자간 소통에 불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게임 내 차별 문제에 대해 남성과 여성, 이분법적으로만 접근했을 경우 또 다른 젠더 갈등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장 교수는 “성별로만 초점을 맞출 경우 또 다른 젠더 갈등이 나올 수 있다”며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게임사의 강압적인 대처보다는 유연한 대처와 선량한 게이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좋은 게임 문화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비난에 대한 공식적인 제재는 오히려 부정적인 행동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유저 간 서로를 간단하게 차단할 수 있도록 하거나, 비난을 일삼는 유저는 평판이 나빠져 게임 참가에 불이익을 주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며 “좋은 매너와 실력을 지닌 게이머에게 보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된다면 장기적으로도 긍정적인 게임 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실의 이도경 보좌관 역시 “게임사의 보다 적극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면서도 “유저 보상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선정 기준을 잘 마련하는 것이 선결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게임사들은 모범 게이머를 위한 보상 제도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LoL은 명예 레벨 제도를 통해 시즌 중 부정 행위로 제재를 받은 경험이 없는 모범 게이머들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있다. 명예 투표를 수집해 명예 레벨을 올릴 수 있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명예 레벨이 오른 유저에게 한정판 ‘스킨’을 제공한다.
벌써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라이엇 게임즈 게임 업데이트 팀 관계자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명예 보상 제도 도입 후 “긍정적인 행동 관련 지표의 개선이 눈에 띈다”고 평가했다.
한편 여성 게이머의 지속적인 증가, 다양한 노력들을 통해 게임 내 성희롱 및 성차별 피해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콘진원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954명의 여성 게이머 중 16.28%의 여성이 성차별을 경험했다. 이는 25.7%를 기록한 전년도보다 9.42%p 감소한 수준이다.
콘진원은 “청소년을 비롯한 게임 이용자 및 게임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게임리터리시 교육을 확대하고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통해 게임 내 성희롱과 성차별 피해 경험을 줄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성기훈 기자 misha@kuki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