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의 상징 ‘중꺾마’…데프트 이전의 스포츠계 원조는?

언더독의 상징 ‘중꺾마’…데프트 이전의 스포츠계 원조는?

기사승인 2022-12-31 06:01:02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시초가 된 유튜브 쿡깸 채널의 썸네일.

지난 10월 DRX 소속이었던 김혁규(현 담원 기아)는 ‘2022 리그오브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그룹스테이지에서 로그와 조별리그 경기 패배 후 “지긴 했지만,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를 인터뷰한 본지의 문대찬 기자가 영상 인터뷰에 ‘로그전 패배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영상 제목을 달았다.

당시 DRX는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의 최하위 시드로 롤드컵에 진출했는데 우승은 고사하고 8강 진출도 어렵다는 평이 따랐다. 하지만 DRX는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더니 강팀들을 하나씩 차례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같은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유독 롤드컵과 연이 없던 김혁규는 10년 만에 커리어 첫 롤드컵 우승을 들어올리며 많은 LoL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로 인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하 중꺾마)’ 문구도 덩달아 화제가 됐다.

이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에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16강에 진출하면서 ‘중꺾마’는 언더독을 대변하는 문구로 자리잡았다.

‘중꺾마’ 이전에, 스포츠계에서는 어떤 언더독 스토리가 있었을까. 스포츠계를 통틀어 인상적이었던 언더독의 스토리를 조명해봤다.

우승을 차지한 뒤 기뻐하는 김보미.   여자프로농구연맹(WKBL)

김보미(삼성생명)

2005년 여자프로농구(WKBL) 신인 드래프트 1차 3순위로 우리은행 한새(현 우리은행 WON)에 입단한 김보미는 신한은행 에스버드를 제외하고 5개 구단 유니폼을 입은 대표 저니맨이다. 그는 데뷔 초창기에 2번의 우승(2005년 여름리그, 2006 겨울리그)을 경험했지만, 첫 우승은 벤치에서 지켜보기만 했고, 두 번째 우승은 경기를 소화했지만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35세의 나이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김보미는 삼성생명 소속이던 2020~2021시즌을 앞두고 시즌이 끝나면 은퇴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정규리그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평균 출전 시간은 20분 남짓했고, 평균 득점은 6.1점 2.8리바운드로 평범했다. 그의 팀인 삼성생명도 4위(14승 16패)로 플레이오프 막차를 간신히 탔다. 

당시 삼성생명의 플레이오프(3전 2선승제) 맞상대는 리그 1위인 우리은행. 모두가 우리은행의 승리를 점쳤다. 1차전 접전이 펼쳐졌지만, 69대 74로 우리은행이 승리했다. 모두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2차전부터 삼성생명의 대반격이 펼쳐졌다. 접전 끝에 삼성생명이 76대 72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윤예빈(26점 11리바운드), 김한별(22점 9리바운드 6어시스트)의 활약이 빛났지만 김보미의 활약을 빼놓을 수가 없다. 16점 6리바운드로 수치도 뛰어났지만 상대 에이스들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베테랑의 투혼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기세를 탄 삼성생명은 3차전에서 64대 47로 승리하며 챔피언결정전(5전 3선승제)에 진출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팀은 삼성생명 이적 전 팀인 KB 스타즈. 당시 ‘국보 센터’라 불리던 박지수가 절정의 폼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삼성생명과 김보미는 또 모두를 놀라게 했다. 1차전에서 KB를 76대 71로 꺾더니, 2차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84대 83으로 승리, 챔프전 2연승을 달렸다.

모든 선수의 활약이 돋보였지만 ‘살림꾼’의 활약은 여전했다. 김보미는 악착같은 수비로 KB의 득점을 막아내고 가장 먼저 속공에 참여해 득점을 마무리했다. 팀이 풀리지 않을 때는 3점슛으로 힘을 보탰다. 당시 객원 해설이었던 하승진은 김보미를 두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렇게 열심히 수비할 수 있나.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20대 초반 같다”라며 극찬을 보냈다.

3·4차전은 KB에 패배하며 벼랑 끝으로 몰린 삼성생명은 5차전에 돌입했다. 3쿼터를 9점 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쉽게 우승을 장담하지 못했다. KB는 4쿼터에 박지수를 필두로 엄청난 추격을 펼치면서 삼성생명의 턱밑까지 쫓았다.

삼성생명의 구세주는 김보미였다. 페인트존 득점을 시작으로 김단비가 쏜 3점슛이 빗나가자 3점 라인 바깥에서 뛰어들어 볼을 잡은 뒤 골로 연결했다. 이후 쐐기 3점슛까지 터트렸다. 3쿼터까지 단 5득점에 그친 김보미는 4쿼터 1분여 동안 7점을 쏟아부으며 KB의 추격 의지를 꺾었다.

김보미의 활약에 힘입어 삼성생명은 15년 만의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여자농구 최초로 4위 구단 우승 기록을 남겼다. 비록 챔피언결정전 MVP는 박지수를 마크하며 평균 20점을 올린 김한별에게 돌아갔지만, 엄청난 투혼을 발휘한 김보미는 가장 기억되는 선수로 남았다. 김보미는 우승 직후 “농구 인생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아무 후회도 미련도 없이 100% 만족한다”라면서 홀가분하게 코트를 떠났다.

지난 26일 댈러스 경기장 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뒤 소감을 전하는 덕 노비츠키.   AP 연합 

덕 노비츠키(댈러스 매버릭스)

1998년 미국프로농구(NBA)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9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입단한 덕 노비츠키(독일)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NBA는 지금과 달리 유럽에서 뛰던 선수들이 NBA에 진출하는 케이스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노비츠키는 댈러스 입단 후 곧바로 팀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3년차 시즌이었던 2000~2001시즌에는 11년 만에 팀을 플레이오프로 올려놓았다. 이후 10년 연속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지만 좀처럼 우승과 연이 멀었다. 특히 2006~2007시즌 댈러스는 67승 15패를 기록, 노비츠키는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지만, 콘퍼런스 1라운드 탈락이라는 굴욕을 쓰기도 맛봤다.

계속해서 플레이오프 무대에 도전하던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2010~2011시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서부 콘퍼런스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른 댈러스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LA 레이커스,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차례로 꺾고 파이널 무대로 올랐다. 

파이널에서 마주한 상대는 슈퍼팀 마이애미 히트. 당대 최고의 스타인 르브론 제임스를 비롯해,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까지 ‘빅3’가 한 팀에 모여 있었다.

1차전에서 댈러스는 마이애미에 84대 92로 패배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비츠키의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노비츠키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댈러스가 마이애미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2차전도 종료 7분여를 앞두고 마이애미가 15점 차로 앞서면서 시리즈는 그렇게 쉽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노비츠키는 부상을 잊은 듯, 엄청난 퍼포먼스를 뽐냈다. 마지막 2분 동안 결승 레이업을 포함 9점을 몰아쳤고 댈러스는 95대 93, 대역전승을 만들었다.

이후 1승을 나눠 가진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운명의 5차전을 마주한다. 당시 손가락이 제대로 낫지 않은 노비츠키는 독감까지 걸리는 상황을 마주했다. 그럼에도 경기를 소화한 노비츠키는 5차전도 정상 출전했고, 29점 6리바운드로 우승까지 1승만 남겨둔다.

기세를 이어간 노비츠키는 6차전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데뷔 13년 만에 NBA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노비츠키는 파이널 6경기에서 평균 26점 9.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만장일치로 파이널 MVP까지 차지했다. 그는 우승 직후 “모든 꿈은 미친 소리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고, 지금은 우리가 염원하던 순간”이라면서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노비츠키의 우승은 NBA 팬들에게 ‘가장 낭만적인 우승’이라고 평가받는다. 노비츠키뿐만 아니라 숀 매리언, 제이슨 키드 등 은퇴를 코앞에 둔 댈러스 선수들이 우승이라는 목적을 위해 뭉친 마이애미 선수단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당시 제임스와 웨이드가 5차전을 앞두고 노비츠키의 독감을 조롱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많은 농구 팬들이 댈러스의 우승에 기뻐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노비츠키는 우승 직후 댈러스에서 8시즌을 더 소화했고, 2019년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은퇴했다. 그의 등번호 41번은 영구결번 처리됐고, 구단은 그의 공로를 가리기 위해 지난 26일 홈경기장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 남쪽 광장에 노비츠키의 동상을 세웠다.


EPL 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에 키스하는 제이미 바디.   제이미 바디 SNS

제이미 바디(레스터시티)

스포츠에서 가장 동화 같은 우승을 꼽는다면 많은 팬은 주저 없이 레스터시티의 2015~2016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을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이다. 이 중 8부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EPL 득점왕을 차지한 제이미 바디는 동화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잇다.

바디의 시작은 8부리그였다. 당시 바디의 주급은 5만 원밖에 되지 않아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장 노동, 저녁에는 축구를 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는 2010년 5부리그인 FC 핼리팩스 타운로 이적했다. 5부리그로 이적한 뒤에는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이후 이적한 플릿타운 FC에서는 우승을 맛보며 4부리그 무대를 밟기도 한다.

2012년 5월 당시 챔피언십(2부) 리그였던 레스터 시티로 이적한 그는 2013~2014시즌에 우승을 하며 ‘꿈의 무대’인 EPL 무대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EPL 무대는 전쟁과도 같았다. EPL 첫 시즌에 레스터시티는 강등권 경쟁을 펼치며 14위로 잔류했다. 전 시즌에 2부리그에서 16골 11도움을 기록했던 바디는 5골 8도움으로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해 레스터시티와 바디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바디는 시즌 중반에 11경기 연속골을 터트리는 등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선 수비 ’ 전술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녔다.

바디의 활약을 앞세운 레스터시티는 결국 창단 132년 만에 처음으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개막 전 도박사들이 책정한 우승 확률을 5000분의 1(0.02%)로 전망했을 만큼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바디와 레스터시티의 동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당시 레스터시티와 우승을 함께했던 주축들은 비싼 이적료를 받고 모두 이적했지만, 바디는 여전히 팀에 남아있다. 바디는 2019~2020시즌에는 EPL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2024년 6월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바디는 이전에 많은 팀의 제안을 받았지만 “그들(레스터시티)은 아무도 날 원하지 않을 때 나에게 기회를 줬던 팀이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실망 시키지 않을 것이고, 절대 이 팀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구단에게 충성심을 보였다.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
김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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