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납치됐다는 고객, 번호는 ‘070’…뜯어 말렸죠” [보이스피싱 막은 사람들③]

“아들 납치됐다는 고객, 번호는 ‘070’…뜯어 말렸죠” [보이스피싱 막은 사람들③]

[편집자주] 보이스피싱 피해가 연간 2000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늘어난 피해액만 500억원에 달한다. 보이스피싱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최일선에서 피해 예방에 고군분투하는 은행원들이 있다. 그들이 펼치는 피해 예방 노력과 현장에서의 어려운 속사정을 들어봤다.

기사승인 2024-05-17 11:00:06
-아들 납치했다는 보이스피싱 사기범
-PPR·필담으로 20여분간 고객 설득한 농협은행 직원들
-“항상 의심해야…꼭 현장 와서 확인을”

경기 성남시 분당구 NH농협은행 이매동지점 권오민 과장이 지난달 19일 고객이 말을 전혀 듣지 않자 은행 전자창구(PPR)를 활용해 보이스피싱 위험을 알린 모습. 농협은행

“부지점장님, 아무래도 보이스피싱 같아요”


지난달 19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NH농협은행 이매동지점. 은행 창구에서 일하던 권오민 과장이 다급히 이현주 부지점장을 찾았다.

권 과장은 A씨(60대·남)로부터 500만원 이상 거액을 모두 5만원짜리로 인출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A씨는 은행에 들어올때부터 이어폰을 꽂은 채 계속 통화 중이었다.

“보통 고객분이 전화 중이시면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든요. 전화를 안 끊으시고,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걸 듣고만 계시더라고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지난 14일 이매동지점에서 만난 권 과장이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고객이 500만원 이상 인출 시 은행 창구에서 공공기관 사칭 전화를 받지는 않았는지 문진을 진행하고, 1000만원 넘는 돈을 인출할 때는 사용 목적을 묻도록 권고하고 있다. 권 과장이 아무리 물어봐도 A씨는 수화기 건너편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고객이 500만원 이상 인출 시 의무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보이스피싱 문진표 작성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대로 둬선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권 과장은 은행 창구 전자창구(PPR)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PPR은 전자서식을 작성할 수 있도록 영업점 내 비치된 태블릿 모니터다. PPR 화면에 ‘통화 상대방이 누군가요’, ‘어떤 내용으로 통화하시는건가요’라는 질문을 띄웠다.

말을 하면 안되는 상황일 수 있다는 생각에 종이와 펜을 A씨에 건넸다. ‘(통화 상대방이 누군지) 몰라요. 1000만원 주고 아들과 맞교환. 지금 사채업자가 아들을 잡고 협박해요. 신체포기각서도 받았으니 아들을 마음대로 하겠대요’. A씨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집어 적은 내용이었다.

‘끊지마세요’. 권 과장은 일단 종이에 이렇게 쓴 뒤 이 부지점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부지점장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출동 뒤에도 A씨는 좀처럼 보이스피싱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부지점장까지 합세해 A씨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20여분이 지났을까. A씨는 결국 그 전까지는 보여주지 않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은 ‘아들’ 이었지만, 번호가 이상했다. 해외에서 발신되는 070번호로 시작하는 게 이 부지점장 눈에 포착됐다. 

“고객 입장에서는 전화 건 사람 이름이 (본인이 저장한 대로) 아들로 뜨니까 충분히 아들이라고 믿으실 수 있죠. 제가 이건 국제 전화번호이고 아드님 이름을 도용한거라고, 아들 아니라 ‘나쁜 놈들’이라고 써서 보여드렸어요. 그제야 저희 말을 듣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이 부지점장이 설명했다.

권 과장과 이 부지점장은 계속해서 필담을 나누며 A씨에게 대응법을 알려줬다. 돈 봉투를 가짜로 만들어 경찰에 건네는 등 수사에 협조했다. 이 부지점장은 A씨 아들 이름과 전화번호도 알아내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이 착신 전환(피해자 전화기로 가야 할 전화를 자신의 전화기로 넘어오도록 하는 것)해 통화가 안됐던 A씨 아들은 나중에서야 이 부지점장에 감사를 표했다.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데에는 직원들의 기민한 대응뿐 아니라 농협은행 내부의 시스템 개선 노력도 있었다. 농협은행은 접수된 보이스피싱 사례를 매달 전국 지점에 공유하고 있다. 나날이 진화하는 사기 수법을 직원에 알리고 교육하기 위해서다. 농협은행은 은행권 최초로 지난해부터 ‘대포통장 의심계좌 24시간 모니터링’을 시행한데 이어, 인공지능(AI)을 적용한 ‘의심계좌 모니터링 신(新)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항상 의심할 것, 무조건 현장에서 확인할 것. 이 부지점장이 강조한 내용이다. 일례로 최근에도 은행 사칭 대출 문자를 받았다면서 문의하는 사례가 적잖다. 은행 등 금융권에서는 절대 문자로 대출권유·안내를 하지 않는다. 이 부지점장은 “직원이 막을 수 있는 범위 밖의 보이스피싱 수법들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서 우려가 크다”면서 “문자나 전화를 받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된다면 반드시 은행, 통신사, 경찰 등 현장에 직접 방문해 확인 해달라”고 당부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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