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지리산 서북능선에 들다

[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지리산 서북능선에 들다

기사승인 2014-08-24 14:34:55
지리산 운무.                        지리산=구성찬 기자

지리산은 우리나라 다른 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스케일과 특성, 그리고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중학교 때 젊은 지리 선생님이 지리산 얘기를 꺼낼 때면 어조가 흥분되곤 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지리산은 80여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면서 물이 풍부해 그 안에 늘 사람들과 마을을 품어 왔다. 마한이 달궁에 세웠다는 산중 왕국, 동학 농민군, 왜란시절과 구한말의 의병, 한국전쟁 후의 빨치산 등이 지리산을 도피나 항쟁의 터전으로 삼았다. 하나의 문화권인 지리산은 그 자체가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한국인 삶의 축소판이다.

철쭉, 산철쭉, 산앵도나무, 정금나무… 진달래과 꽃나무들의 왕국

지난 13일 지리산에 들었다. 탐방객들이 몰려드는 주능선을 피해 서북능선을 걷기로 했다. 지리산 서북능선은 남원시와 구례군에 걸쳐 있는 운봉~바래봉~팔랑치~부운치~새동치~세걸산~정령치~만복대~고리봉~성삼재~노고단 구간을 일컫는다. 총 18,4㎞로 하루에 주파가 거의 불가능한 코스다. 그래서 5월에 산철쭉 군락이 아름다운 바래봉 구간을 생략하고 산덕마을 임도를 따라 팔랑치를 거쳐 우선 정령치까지 가기로 했다.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떨어진 낙엽송 가지들이 즐비하다. 물봉선, 물레나물, 이삭여뀌, 오리방풀, 짚신나물, 참취, 참나물, 네잎갈퀴 등의 꽃을 봤다.



능선에 올랐어도 전망이 확 트이지 않을 정도로 조릿대와 미역줄 등이 길을 가리고 있다. 철쭉과 산철쭉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동행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자원보전처의 오장근 박사는 꽃이 없을 때 진달래와 산철쭉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산철쭉은 잎에 홈이 파져 있고, 잎의 양면에 털이 있다는 점이 진달래와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꽃 모두 산철쭉이 남성답다면 진달래는 여성답다고 판단하면 쉽다. 이날 보지는 못했지만, 이 능선에는 진달래과의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흰참꽃도 서식한다.

서북능선에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조망점마다 몰려다니는 구름에 주로 뒤덮여 있어서 반야봉과 주능선을 보기는 힘들었다. 해발고도가 1000m 이상의 높은 능선에서 콩알보다 더 작은 빨간 타원형 열매를 보았다.
산앵도나무 열매였다. 진달래과의 한반도 고유종으로 키는 1m 정도로 작다. 고도가 조금 더 낮은 곳에는 같은 산앵도나무속의 정금나무가 서식한다. 키가 2~3m인 정금나무 열매는 최근 ‘토종 블루베리’로 알려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블루베리보다 항산화 성분이 3배나 더 많다고 한다.

탐방로의 높낮이가 급격히 변해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십여년 전 철쭉 피는 5월에 서북능선을 걸었던 적이 있지만, 힘들었던 기억이 없어서 쉽게 봤는데 일부 구간은 주능선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보니 나무와 풀들이 웃자라서 팔을 머리 높이로 들어 가지를 헤치고 전진해야 했다. 다양한 꽃들. 바위채송화, 꽃며느리밥풀, 바디나물, 마타리, 은꿩의다리, 좁쌀풀 등의 꽃이 산행의 힘겨움을 달래준다. 시들어가는 산수국 꽃(중성화)이 연녹색부터 보라색, 검은 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드러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산뽕나무 거목도 눈에 띄었다. 비교적 흔한 철쭉의 경우 키가 4m, 밑둥치 지름이 15㎝에 이르는 개체도 보였다.



사람과 마을을 살리는 ‘어머니의 산’

‘어머니의 산’, 지리산은 전남·북, 경남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걸쳐 있다. 그 너른 품 안에서 천연기념물인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수달 등을 비롯해 동물 2718종과 식물 1372종이 산다. 지리터리풀, 지리대사초 등 ‘지리’ 접두어가 붙은, 거의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한반도 고유식물도 16종에 이른다. 사람도 많이 산다. 산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경상대 최원석 교수는 “지리산지에는 500여개가 넘는 자연마을에 4만7000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한국의 산지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리산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과 동식물이 함께 살아가는 산이라는 점이다. 금강산도 매우 깊고, 아름다운 산이지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 수는 없는 곳이다. 반면 지리산은 비교적 높은 곳까지도 물이 풍부해서 논농사가 가능하다. 넉넉하게 많은 사람들을 품어줬고, 지금도 품고 있다. “지리산은 높고 험하지만 화전민도 천석(千石)을 한다고 할 정도로 그 골이 넓고 깊었다. 지리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풍족했다.” (‘지리산문화권’, 국민대 국사학과)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중이나 세속 사람들이 대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수고하지 않아도 생계 꾸리기가 족하며,…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흉년을 모르므로 부유한 산이라고 부른다”고 썼다.

과거 협력했던 지리산권 지자체들, 교통 좋아지고서 오히려 반목

정령치까지 거의 4시간을 걷는 동안 탐방객이라고는 두 팀, 6명을 마주쳤다. 종주 산행객들이 성삼재~천왕봉 주능선 구간에 더욱 더 쏠리면서 서북능선 길은 예전보다 더 한산해졌다. 지리산 서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포장되고 이동시간이 단축되면서 지리산에 머무르는 시간이 역설적으로 짧아진 탓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부터 정령치를 잇는 지방도 737호선,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부터 전남 구례군 천은사 구간의 지방도 861호와 주천면 육모정에서 고기리를 잇는 지방도 60호 등은 1988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개통됐다. 지리산은 반나절, 하루, 1박2일 등으로 코스가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남원 운봉에서 경남 산청 대원사까지 가는 60여㎞의 ‘지리산 대 종주’는 이젠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개념이 됐다. 구례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가는 ‘화대종주’가 ‘대종주’로 오해되는 실정이다.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5개 시·군들은 각 지방도로를 연결하고 터널을 뚫어 서로 오가는 이동거리를 단축시켰다. 이런 저런 개발사업으로 도로와 편의시설이 늘면 관광객도, 주민 소득도 늘어야 마땅하지만, 지리산권의 주민도, 그들의 소득도 증가했다는 소식은 없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지리산 서북쪽 구간의 탐방객은 크게 줄었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개통이후 수도권으로부터 이동시간이 단축된 함양, 산청 쪽으로 수도권 관광객 일부가 옮겨갔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입구의 유명한 산채백반 식당가는 잇따른 폐업과 더불어 썰렁해졌다.

그 지방자치단체들이 이제는 지리산 케이블카(로프웨이) 건설 계획을 놓고 서로 우리가 더 타당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로프웨이 설치기준이 완화되고 나서 노고단이나 천왕봉 턱밑에까지 기계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자 서로 로프웨이를 놓겠다고 경쟁하는 형국이다. 주민들이 지리산이 국립공원인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관광지가 되길 원하면 더 편하게 빨리 지리산을 둘러보게 되는 관광객들은 그나마 1박도 하지 않고 도시로 되돌아 갈 것이다.

옛날에도 지리산권에 영·호남의 구분이 없던 것은 아니나 서로 교류가 잦았고, 외침에 맞서서는 서로 자주 연합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지리산권 안에서 50개 전통 장과 행정구역 경계인 벽소령, 장터목 등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지리산의 구심력에 이끌려 다른 가까운 지역보다 지리산 인접 마을들과 생활권을 더 많이 공유했다. 그러나 문명과 교통수단이 더 발달한 지금 지리산권의 지자체간 단절이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 경계를 둘러싸고 274km의 둘레길이 전 구간 개통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주민과 탐방객 편의를 위해 이 길을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자는 환경·시민단체의 요구도 유명무실한 지자체협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아름드리 주목 사라진 노고단 훼손지, 특별보호구역 지정 후 자연 일부 되살아나

세걸산에서 정령치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오 박사는 “식민지시대 이전에는 이 서북능선에 아름드리 주목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죄다 벌목해 버렸다”고 말했다. 사실 지리산의 최근 역사는 전란과 화전, 벌채와 도로건설 등으로 인한 산림 훼손의 역사이기도 하다. 노고단이 휴양지 조성과 벌목으로 파헤쳐진 데 이어 천왕봉~제석봉 구간 구상나무 숲은 6.25 전쟁 후 화재로 소실됐다. 노고단은 이후 1970년대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통신시설이 들어섰고, 차량통행과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노고단 훼손지 복원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승용차편으로 성삼재까지 이동했다. 만복대, 고리봉을 거쳐 성삼재까지도 걸어가고 싶었지만, 당일 노고단까지 갔다 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포장도로가 있으면, 걸을 때에는 비난하면서도, 시간 절약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이용할 수밖에 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994년부터 노고단 정상을 포함해 총 2만6000㎡에 대해 훼손지 복원사업을 펴고 있다. 목재 울타리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노고단 정상부근 특별보호구역 안에는 지리산을 대표하는 여름꽃인 노란 원추리와 보라색 둥근이질풀 꽃이 지천이다. 범꼬리, 산비장이, 층층잔대, 구절초, 고추나물 등의 꽃도 보인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곰취 군락도 노란 꽃이 한창이다. 그밖에도 산오이풀, 할미꽃, 송이풀, 수리취 등 200여종의 식물이 서로 잘 어우러져 있다.

복원사업과 자연휴식년제 실시에도 불구하고 한번 망가진 숲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노고단 일대는 연중 기온이 낮고 비와 바람이 많은 아고산대여서 자연의 힘으로 치유되기 어렵다. 공단은 2007년부터 정상일대를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탐방시간과 성수기 탐방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이후 노고단에 초록색이 되살아나고 있다. 공단은 60%의 식생 복원률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노고단이 100여 년 전의 울창하던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오 박사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노고단에 (멸종위기생물인) 복주머니난(개불알꽃)도 많았는데 모두 캐가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노고단 일대를 일제시대부터 잘 보존했으면 반야봉 숲 정도의 종 다양성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제 노고단의 복원률이 더 높아지더라도 기후변화의 영향도 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수종이 복원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지금 지리산 밑에서는 케이블카 건설계획, 지리산댐 건설 논란 등으로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반목하는 기류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산’ 속에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결과적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건재해 있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를 생각하면서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저항세력들의 거점이었던 ‘불복산(不伏山)’이라는 지리산의 또 다른 별명을 떠올려 본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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