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에서 아점을] “프러포즈 반지를 냅다 던져버렸죠”

[티파니에서 아점을] “프러포즈 반지를 냅다 던져버렸죠”

기사승인 2018-02-26 00:07:00

이 글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다._편집자.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A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 두통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창밖을 보고 있자니 구름 너머로 샤를드골 공항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도 왔네.’ 그날도 그랬었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얼마나 동떨어지게 느꼈던가. 얼마나 화가 나던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다 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아이쿠 머리야.’

괜찮으세요?” 어느새 승무원이 근심 섞인 표정으로 곁에 서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물 한잔 드릴까요?” “.” 생수를 한 모금 삼키자 두통은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지만, 되레 기억은 더 선명해졌다. 비행기는 눈에 띄게 속도가 잦아들고 있었지만, A는 흡사 137노트 이상인 것처럼 느꼈다.

이걸로 할게요.” “굿 초이스세요. 프러포즈?” “비슷한데 하하.” “여자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장담해요.” “, 그렇겠죠?”

반지 상자를 집어 들고 입을 반쯤 벌리며 웃던 A가 문득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이 정도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다는 듯, 썩 흡족하지만은 않다는 듯 어설픈 너스레를 떨었다. 사내의 귀여운 연기에 속아 넘어주는 척하던 점원이 돌아서려는 A에게 미소 섞인 한마디를 전했다. “행운을 빌어요라고.

이크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약속 장소로 걸음을 재촉하던 A는 여사친(여자사람친구들. A, “대개 도움이 안됐다.)의 조언을 떠올렸다. “, 반지 끼워주고 결혼하자 그래. 남자가 박력이지. 너네 나면 어쩌려고 그래. 사실 걔니까 너 만나주지. 진작 취업만하면 결혼하자고 했어야지. 너무 기다리게 했어. 나 같으면 진작 끝이다, !”

A는 안주머니에 넣어둔 반지가 무사한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너만 믿는다!’ B는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불안했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만큼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반질 보면 완전 좋아서 난리가 나겠지?’

또 늦었네.” “어딜 들렸다 오느라고.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배 안고파.” “난 배고파 죽겠어. 그러지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다 시켜. 내가 쏠.” “배고프지 않다고 했잖아! 넌 항상 너 위주더라.” “아니면 아니지, 왜 짜증을 내.” “됐어. 이제 싸우는 것도 지친다.”

이게 아닌데.’ AB의 예민한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다. 당황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요즘 B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한소릴 들을 만한 짓을 해도 잠자코 넘어가 주곤 했던 것이다. 솔직히 편했다. ‘술 그만 마셔라’, ‘담배 끊어라등등 B의 잔소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도 취준생에서 이제 겨우 취업에 성공한 A는 주말이면 피곤하단 핑계로, 평일은 바쁘단 핑계로 B방치했다’.

A도 할 말은 있었다. 회사 일은 빡빡했고, 어려웠다. 경쟁도 심했다. 조금만 소홀해도 책잡히기 쉬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신입사원이란 언제라도 타깃이 될 수 있는 초식동물에 다름없었다. B가 이해해주길 바랬던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건 B가 훨씬 전부터 직장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미안함이 들기 훨씬 전부터 B는 지쳐있었다.

할 말 있어. 날짜 잡혔어.” “날짜? 무슨 날짜?” “출국 날짜. 좋은 기회고, 집에서도 가길 바라셔.” “미룰 순 없는 거야?” “이미 마음 정했어.” “가기 싫다고 그래.” “부모님만의 문제가 아냐. 이젠 내가 못 참겠어. 지겨워.” “내가 지겨워?”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침묵. 그 사이로 문 리버(Moon river)의 선율이 스며들었다. ‘날 꿈꾸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하는 그대. 당신이 어딜 가든 따를거에요. 함께 무지개의 끝을 찾고, 구부러진 길에서 머물기도 해요. 달빛 가득한 강 그리고 난.’

따라와도 좋아.” 창밖을 바라보던 B가 천천히 고갤 돌리며 입을 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라곤 하지마. 힘들어지면 날 원망하게 될 거야.”

연인의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둘은 입을 맞춘다. 이내 어둠 속으로 함께 사라지는 둘. 미래를 약속하며. 드라마였다면 이러한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겠지만, 우린 때때로 꿈과 너무 다른 현실에 서글퍼진다. 그리고 AB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B의 말이 끝나자, A는 반지 상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뜯긴 포장지와 부서진 상자 틈으로 굴러 나온 반지가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쳐다보던 B가 입을 뗐다. “꼭 우리 같다.”

그렇게 끝이었다. 그날부터 A는 매일 소주를 마셨다.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 다시 술잔을 들이키던 A, 아무도 모르게 베개를 눈물로 적시던 B에게 최근 몇 달은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출국일이 됐다.

너도 참, 그렇게 끝낼 거면서 울고불고. 걔도 참 독하다. 아무리 헤어졌다고 공항에 배웅도 안 온대니?” “1절만 해요.” “정말 안 데려다줘도 돼?” “알아서 갈게.” “아니, 그래도.” “엄마, .”

짐을 부치고 나자 정말 떠나는 게 실감났다. 언제 돌아올 거냐는 물음에 B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약속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헛헛한 마음까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드라마처럼 공항에 나타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전화한 통 없는 A가 한편으론 밉기도 했다. 가장 화가 났던 건 그날 A의 태도였다. 거짓말이라도 끝까지 따라오겠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독해지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놈.’ 그때,

생각해보니까, 결혼반지는 한 쌍이더라.” “네가 여기 웬일이야?” “내 것까지 내 돈으로 샀으니까, 나중에 갚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힘들어져도 네 탓 안 할 테니까, 반지부터 일단 끼고 보자.”

그 다음 이들이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일지, 그 반대일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 순간 그들이 공유하던 기억이란, 머리 위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는 것과,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이 꽤 밝았다는 것 뿐.

에필로그

할 일이 태산인데,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미안, 어딜 좀 들르느라.” “아무튼 굼벵이야. 어떻게 오빤 만날 늦냐. 쫓아온다고 할 때, 그냥 뻥 차버리는건데.” “쏘리 쏘리.”

멱살을 잡으며 장난을 치는 여인이나,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시늉을 하는 사내의 손가락에는 똑같은 반지 한 쌍이 끼워져 있었다. 둘의 토닥거림은 노란색 택시를 타고 나서도 계속됐다. 뒷좌석의 소음이 성가신 운전사는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날 꿈꾸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하는 그대. 당신이 어딜 가든 따를거에요.’

이 글은 취재진에 보내온 실제 사연을 재구성했습니다.

글, 구성 김양균 angel@kukinews.com

사진 Yong J. Kim, 영화 '티파티에서 아침을', Tiffany&Co.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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