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지지(地誌, Topographie des Terrors)라는 이름의 역사박물관 서쪽으로 핑크색 외벽을 한 건물이 있다. 마르틴-그로피우스 건물(Martin-Gropius-Bau)이라는 베를린의 유명한 전시홀이다. 1877~1881년 사이 건축가 마르틴 그로피우스(Martin Gropius)와 헤이노 쉬미든(Heino Schmieden)이 신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다.
각 변의 길이가 70m인 정방형의 대지에, 26m 높이로 지은 이 건물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응용예술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가 베를린의 선사시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동아시아의 미술 수집품을 보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크게 손상을 입었고, 1978~1981년 사이에 복원해 개관했다.
이 건물은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베를린 장벽에 바짝 붙어있어 있었다. 건물의 바로 앞을 지나는 니더키르히너스트라세에는 공포의 지지에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이 연장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 1961~1989)’이라 새긴 금속 띠가 도로에 새겨져있다.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은 베를린시 하원(Abgeordnetenhaus) 건물이다. 1899년부터 프로이센왕국의 입법기관인 대표회의가 들어있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18~1919년 독일 혁명 이후 1921년부터 1933년까지는 프로이센의 자유의회가 사용했다. 1993년 이후로 베를린시의 하원이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앞에 있는 작은 광장 왼편에는 헤르만 쉬벨바인(Hermann Schievelbein)이 제작한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라이히스프라이헤어(Heinrich Friedrich Karl Reichsfreiherr) 장관의 동상이 서있다. 180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치하의 프로이센 왕국에서 경제-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내부관세의 철폐를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내각에서 물러난 1807년, 그는 “프로이센 왕국의 최고 권력과 주정부, 재정 및 경찰 당국의 적절한 형성(Über die zweckmäßige Bildung der obersten und der Provinzial-, Finanz- und Polizei-Behörden in der preußischen Monarchie)이라는 제목의 나사우어 각서(Die Nassauer Denkschrift)를 통해 프로이센 왕국의 개혁을 제안했다.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프로이센 왕국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들이 국정에 활발하게 참여함으로써 왕국과의 연대감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807년에는 농노해방을 시행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체계를 개편하는 등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1808년 해임됐다.
11시 반에는 다음 일정인 홀로코스트 기념비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에 버스가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을 지났다.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 인근의 포츠담에서 오는 길이 베를린 성곽과 만나는 곳이란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여러 시골마을에서 오는 길이 베를린 성 밖에서 수렴되는 교역소로 시작됐다. 베를린의 14개 성문 가운데 포츠담성문 (Potsdamer Tor) 앞에서 5개의 도로가 교차했다.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가 1685년 공포한 포츠담 관용 칙령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유대교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위그노파 등 종교난민들이 베를린으로 유입됐다.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신도시를 베를린 외곽에 조성했는데, 부란덴부르크 지역에 있는 프리드리히슈타트는 선제후의 이름을 딴 도시로 신도시 가운데 가장 컸다.
1871년 독일제국이 창설된 뒤로 포츠담 광장에는 수많은 식당들이 들어선 대형 건물을 건설됨으로써 성장이 가속돼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그랜드호텔 벨뷰(Grand Hotel Bellevue)와 팔라스트 호텔(Palast Hotel)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문을 열었다. 이 무렵 부유한 베를린 시민들은 성문 밖에 있는 티어 가르텐 가까이 빌라를 짓고 살기 시작했다.
포츠담 광장 역시 2차 세계대전 중 거의 대부분 파괴됐다. 전후에 동서베를린의 경계가 포츠담 광장을 지나갔지만, 포츠담 광장이 곧 재건될 것으로 믿은 사람들이 세운 가건물은 1953년 6월 17일 시위에 불타버렸고, 1961년에 세운 베를린장벽은 포츠담 광장을 가로 질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광장은 1990년대 들어 유럽 최대의 건설현장이 됐다.
광장 가운데 서 있는 시계탑이 있는 신호등은 1924년 10월 유럽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것으로 지금까지도 그때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신호등 가까이 있는 푸른빛의 유리창으로 뒤덮인 DB건물 다음에 있는 건물이 2000년에 완공된 소니센터이다. 소니의 유럽본부를 비롯해 대형 공연장, 극장, 쇼핑센터를 비롯해 많은 식당이 들어있다.
소니가 7억5000만 유로를 투자해 지었지만, 경영난을 겪으면서 투자회사로 넘어갔던 소니센터 건물은 2010년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이 5억7000만 유로에 인수했다. 포츠담 광장으로 올라오는 지하철 출입구 앞에는 옛날 이곳에 서있던 베를린 장벽의 잔해를 세워놓고 있다.
살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관(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1구획 남쪽으로, 티어 가르텐과 코라-베르리너-스트라세 사이에 있다. 1만9000㎡ 넓이의 오르내림이 있는 구획 전체에 들어선 기념관은 페터 아이센만(Peter Eisenman)과 부로 하폴드(Buro Happold)가 설계한 것이다.
베를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포츠담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살던 곳으로 유럽에서도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에 이곳에 기념관을 지은 것이다.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2711개의 스텔라에(Stelae, 기념 돌기둥;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돌이나 나무로 된 슬라브 구조물로, 무덤에는 장례와 관련된 기념물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정부의 공지표지로, 국경선 혹은 재산선을 나타내는 경계표지로 사용됐다)를 남북으로는 54열, 동서로는 87열로 배열했다.
스텔라에의 크기는 길이 2.38m, 폭 0.95m 이며 높이는 0.2m에서 4.7m에 이른다. 이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함으로써 지상에서는 비슷한 높이로 보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스텔라에 사이를 걷다보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마음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에 있는 스텔라에는 야트막해서 사람들이 올라서거나 앉을 수도 있게 돼있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올라서서 사진을 찍었던 모양이다. 쫓아온 보안요원에게 야단을 맞았다.
가까운 브란덴부르크 문까지는 걸어서 갔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에 있는 18세기 무렵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념비다.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전환되던 바타비아 혁명의 초기에 개입에 성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에 따라 건설된 기념비다.
네덜란드는 18세기 말까지 4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한 애국시민들이 구체제의 공무원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민병대(Exercitiegenootschappen)를 창설했다.
1785년 애국 민병대의 공격을 받은 오렌지공 윌리엄 5세 총독의 부인, 프레데리카 소피아 빌헬미나(Frederika Sophia Wilhelmina) 공주는 오빠인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2만 병력을 보내 애국민병대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들어선 프랑스공화국에 대항한 연합군에 가담하면서 네덜란드는 프랑스공화국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바타비아 혁명은 1795년 바타비아 공화국이 창설되는 것으로 귀결됐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형제인 루이 나폴레옹이 즉위하는 네덜란드 왕국으로 대체됐다. 1810년에는 다시 프랑스 제국에 합병됐다가 1813년 주권을 회복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수도가 있던 브란덴부르그 안 데어 하벨(Brandenburg an der Havel)이라는 마을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옛 성문이 있던 장소에 세워졌다. 설계를 맡은 카를 고트하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관문인 프로필라에(Propylaea)에서 영감을 얻어 12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앞뒤로 세웠다.
각각의 6개의 기둥은 5개의 통로를 이루고 있다. 중앙의 통로는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바깥쪽에 있는 2개의 통로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성문의 꼭대기에는 요한 고트프리트 쉐도우(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4두 마차(Quadriga)를 올렸다. 마차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와 정복의 여신 니케(Nike)가 몰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원래 평화의 문(Friedenstor)이라고 불렀다. 브란덴부르크 문 양쪽으로 부속건물을 지었는데, 남쪽 건물은 수비대의 숙소로 사용됐고, 북쪽 건물은 세관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이었다.
성문의 높이는 20.3m인데 4두 마차의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약 26m이다. 너비는 62.5m이고 폭은 11m이다. 기둥의 높이는 13.5m인데, 아래쪽의 직경은 1.73m이다. 중앙통로가 가장 넓어서 폭이 5.65m이며 나머지 4개의 통로는 폭이 3.80m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의 동쪽의 광장은 1814년 나폴레옹 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광장(Pariser Platz)이라고 부른다. 파리광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브란덴부르크문의 왼쪽에는 로마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조각을 오른쪽에는 로마신화에서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조각을 세웠다.
두 조각상은 브란덴부르크 문의 측면에 세운 2개의 기둥 사이 공간에 만든 벽감에 세워졌다. 4두 마차 아래의 고미다락에 새긴 부조는 조각가 콘라트 니콜라우스 보이(Konrad Nikolaus Boy)와 크리스티안 운거(Christian Unger)가 맡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의 모습을 새겼다.
1806년 예나-아우에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 프러시아 군을 패퇴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브란덴부르크 문에 있던 4두 마차를 파리로 옮겨갔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에른스트 폰 퓌엘(Ernst von Pfuel) 장군이 파리를 점령한 뒤, 4두 마차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3제국 시절 브란덴부르크 문은 나치당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총알과 포탄의 파편으로 기둥이 손상됐고, 4두 마차 역시 피해를 입었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은 대체로 형태가 유지됐다. 종전 후에는 동서베를린의 통로로 사용하다가 1961년 베를린봉쇄 때부터 통행을 금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브란덴부르크 문은 자유와 동서독의 통일을 상징하는 국민적 욕구의 상징이 됐다. 2000년부터 광범위한 복원작업을 거친 끝에 2002년 다시 일반에 공개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