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는 일본 아베정권의 경제침략과 군국주의 부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가 전격 종료된 시점에서 일본 침탈의 뼈아픈 역사 현장을 돌아보았다. 지난 3,1절 연재한 다크투어(dark tour) 시리즈 ‘적산가옥’ 이어 430여년 전 우리 선조들에게 7년 전쟁의 고통을 안겨준 임진왜란 당시 축조한 한국 내 일본성인 왜성(倭城)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일본성의 원조 ‘왜성’이란
2. 왜성의 원형이 잘 보존된 서생포 왜성과 울산 왜성
3.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 순천왜성
4. 눈뜨고도 코베인 사천왜성 외 남해안의 주요
1. 일본성의 원조 ‘왜성’이란
-임진왜란 7년 동안 동‧남해안 일대 31개 축성-
-성돌 하나하나, 강제 동원된 백성들의 눈물과 한 배여-
-한·일 축성 구조 혼재, 연구가치 높아-
-치욕의 유적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국가지정문화재에서 지방기념물로 등급 낮춰-
-아픈 상처지만 보존 필요, 정부 나서 더 이상 훼손 막아야-
1592년 음력 4월13일(선조 25년) 저녁, 1만8천명의 왜군을 7백여 척의 병선에 나눠 싣고 쓰시마를 출발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부산진성을 지키고 있던 정발장군은 급히 군사와 백성을 수백 명을 모아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에 밀려 장렬히 전사한다. 명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왜장의 요구를 무시하고 “싸워서 죽을지언정 길을 빌려줄 수 없다.”며 송상현(宋象賢) 부사가 고군분투한 동래성 역시 순식간 무너졌다.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하루 20km씩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시급히 신의주까지 피신했다. 율곡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주장과 통신사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의 고언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은 때늦은 후회였다. 이후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활동,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수세에 몰리자 이듬해 봄 한양 이남으로 후퇴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이후 명나라와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룬 후 1593년 4월부터 휴전협정을 진행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일본과 가까운 부산과 주변 지역에 성을 집중적으로 축성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구한 무리한 강화조건으로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조선침략(정유재란)을 일으켰고 동시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성을 추가로 축성했다. 이렇게 왜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남해안 일대에 쌓은 31개의 일본식 성을 왜성(倭城)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1592~1596) 때 축조한 왜성은 서생포 왜성, 기장 죽성리 왜성, 동래 왜성, 부산 왜성, 자성대 왜성,구포 왜성, 김해 죽도 왜성, 가덕도 왜성, 안골포 왜성, 웅천 왜성, 거제 영등포 왜성, 장문포 왜성 등 23개이고 정유재란(1597~1598) 때는 울산에서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어 울산 왜성을 비롯한 양산 왜성, 창원 왜성, 거제 왜성동 왜성, 고성 왜성, 사천 왜성, 남해 왜성, 순천 왜성 8개의 왜성을 신축하였다.
왜성의 형태와 특징
왜성의 형태는 대부분 바닷가 인근 전략적 요충지에 본성을 쌓고, 본성 인근에 지성을 배치했다. 산정상이나 구릉지에 지휘본부인 천수각을 세워 주위에 본성곽을 구축하고 그 아래쪽으로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 등 여러 단계의 성곽을 겹쳐 만들어 각각 독립적인 방어가 가능하도록 했다.
성문 역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견고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성벽은 60~70° 경사지게 쌓는 것이 특징으로, 외면은 대부분 자연석이나 할석(깬 돌)을 면석으로 쌓고, 그 안쪽에는 작은 돌을 채워 견고하게 한 뒤 다시 흙으로 충분히 다져서 석축 성벽을 보호하였다. 성벽은 하단 부분에 굴곡을 많이 주어 튼튼하면서도 측면 방어에 용이하게 하였다.
성 외곽에는 적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해자(空堀)도 설치했다.왜성을 점령하려면 해자를 넘어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한다. 공격보다는 방어하기에 좋은 구조여서 7년 임란전쟁 동안 조·명 연합군이 전투를 통해 왜성을 점령한 기록은 없다.
전쟁 후에는 서생포진성이나 부산진성의 경우처럼 우리가 다시 형태를 바꾸는 등 여러 성에서 한국과 일본 성의 모습이 혼재된 형태로 나타난다. 왜성의 여장은 고려시대 성곽 상부에 시설했던 성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생활과 행정 중심의 읍성 위주로 축조하다가 임란 이후에는 전쟁에 대비 산성을 쌓으면서 다시 성랑을 만들고 남한산성의 북벽과 수원화성 등에서는 왜성의 형태를 본떠 성벽 아래 부분이 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성을 버리고 퇴각하면서 천수각 등 성내의 목조건물은 모두 불태웠다. 이후 대부분의 왜성들은 수백 년 동안 우리 군이 진성으로 활용했다.
심정보(68) 한밭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는 “왜성은 축조 당시 대부분 우리의 읍성이나 진성에서 성돌을 빼다가 쌓은 구조물이다.”라며 “형태는 일본성이지만 우리 성곽의 축조기법을 일부 활용하고 우리 땅의 돌과 흙으로 축성한 변형된 우리 성이라 말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 등 여러 곳에서 성을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향인 구마모토에 조명연합군의 일본정벌에 대비해 대규모 성을 신축 했다. 한국에서 유능한 성벽기술자를 데리고 가 한 단계 발전시켜 쌓은 구마모토 성은 일본 3대 성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은 참혹했던 7년 전쟁동안 전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는 파탄되고 인명 손상은 물론 많은 문화재가 손실되고 일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일본은 전범국이 아니라 히로시마 피폭으로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한 피해국가로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일본이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이웃나라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 산 증거물 왜성을 잘 보존해 그들에게 확인하고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유적과 더불어 역사적 교훈의 산물로 왜성을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일본엔 에도 막부시대 이전의 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일 학계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왜성들이 일본 성 축조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판단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의 역사, 건축, 고고학 전문가와 왜성에 관심이 많은 왜성연구회 회원,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왜군의 후손들이 왜성을 찾고 있다.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인 나동욱(57) 박사는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관련 사실상 유일한 실체적 증거물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을 쌓으면서 왜군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을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든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면서 “또한 성이란 석축기술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 상황은 기초적 수준이고 정부나 지자체의 노력도 미미한 실정이다. 한‧일 관계사 측면에서 왜성의 존재와 실태를 바로 인식하고 보존·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곽경근 대기자kkkwak7@kukinews.com 사진=곽경근 대기자/ 왕고섶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