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의 1년 여행을 시작하면서 거처를 함덕으로 정했는데 지내보니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이곳은 거의 평생을 도시에서 생활해온 내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지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가까운 곳에 장을 볼 수 있는 꽤 큰 마트가 3곳이나 있어 생활용품 구입이 편했다. 보다 큰 대형 마트를 가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차로 40분쯤 걸리는 제주시내에 있는 대기업의 매장에 가면 된다. 또한 어디를 가든 길 위에서 시간을 빼앗기는 경우가 없다. 제주 시내에 거처를 정했다면 도심을 벗어나기 위해 늘 20분 이상은 허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의 동부지역은 중산간지역이든 해안이든 가 보아야 할 명소가 차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밀집되어 있어 언제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다.
걷자고 제주에 왔지만 어디를 어떻게 걸을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걷다가 힘이 붙으면 올레를 걷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자연휴양림을 알게 되어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보통 8 킬로미터 내외인 자연휴양림 산책로는 안전하기도 하거니와 숲이 짙어서 걷기도 편했다.
그렇게 걷다가 계획을 조금 더 구체화 했다. 최종 목표는 ‘제주 올레길 전체 걷기’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7월과 8월엔 자연휴양림과 오름의 탐방로를 걷기로 했다. 1차 목표는 9월 안에 15 킬로미터 정도의 ‘사려니숲길’을 큰 어려움 없이 걸어내는 것이었다. 중간 목표와 최종 목표를 정해 놓으니 매달, 매주 무엇을 할 것인지 역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번 제주도 여행처럼 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늘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에 바빴다.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길이 보였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다. 그 때부터는 다르게 살았어야 했다.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시작할 것이며 5년 후를 위해 무엇을 하고 40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한 번쯤은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한 고민은 그 때도 내겐 여전히 사치였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게 계획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2년도 채 되지 않아 직장을 두 번이나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해 그 차이를 하루 빨리 줄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 번째 직장에서는 노력의 결과가 좋아 직장에 대한 기여도가 다른 누구보다 높게 평가받았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다른 곳에서 약 2배의 급여를 제안해 왔다.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새 직장에선 일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채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그리고 3호선의 출근구간에 있는 거의 모든 정거장의 화장실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앉으면 아랫배의 불편한 느낌이 가라앉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서둘러 나가 지하철을 타면 대여섯 정거장을 가기도 전에 내려 화장실을 가야 했다. 뛰다시피 급히 화장실을 찾아가도 늘 아무런 반응은 없었다. 다만 잠시 앉았다 다시 지하철을 탈 뿐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출근하면 점심시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점심과 저녁을 사무실에서 해결하고 늦은 밤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잊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화장실 찾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까닭 모를 부끄러움에 내 몸이 이렇다고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11개 월 째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내 몸의 증상을 이야기 하고 더 이상 출근할 자신이 없어 일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직장에는 사정상 한 달 후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도약의 기회라 생각하며 이직했던 직장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마라톤 경기에 나서서 출발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다 쓰러진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집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몸이 좋아지면 다시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늦잠도 자고 식사는 먹고 싶을 때 먹었다. 그렇게 세상을 잊었다.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무엇이든 완전히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았다. 정년퇴직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직장생활에서의 아쉬움과 서운함은 제주도로 훌쩍 떠나와 전혀 다른 생활을 준비하며 깨끗이 사라졌다. 때로 함덕을 눈에 담고 잘 다듬어진 숲길을 걸으며 낯선 지역에서의 불안함도 조금씩 떨쳐냈다.
절물자연휴양림과 교래자연휴양림의 산책로와 탐방로를 걷고 세 번째 찾은 곳이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이었다. 세 곳은 어디를 가더라도 큰 차이를 느끼지 않을 만큼 비슷한 조건의 숲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가 한라산의 동쪽 중산간 지역의 곶자왈과 인공조림지인 삼나무숲, 그리고 오름을 포함하고 있어서 기본적인 배경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숲 안쪽엔 올레에 오르기 전 걷기로 한 사려니숲길이 손짓하고 있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 들어서면 곰솔 숲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잘 자란 곰솔 숲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휴양시설과 체험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이 휴양림의 가장 큰 특징은 노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잘 반영된 숲속 산책길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 데크를 설치해 조성한 숲길 위에 서면 4대가 함께 유모차와 휠체어을 타고 밀며 걸어도 불편함 없이 숲을 즐길 수 있다.
편안한 길을 걸으며 곰솔 숲의 향기와 정취를 눈에 담고 조금은 무질서하게 보이는 활엽수 숲의 자유로움을 즐기다가 야자매트가 깔린 길로 들어서면 6.7 킬로미터의 제법 긴 말찻오름탐방로가 시작된다. 이 탐방로는 곰솔 숲, 삼나무조림지, 활엽수 숲을 지나고 경사지를 오르고 내리며 다양한 제주 숲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어려운 길이 아니면서 도무지 지루할 겨를이 없는 길이다.
말찻오름탐방로까지 걷고도 시간이 꽤 많이 남으면 휴양관 근처의 잘 정돈되어 있는 정원을 즐겨도 좋고 붉은오름을 걸어도 좋다. 붉은오름까지는 왕복 2 킬로미터 정도인데 다녀올 가치는 충분하다. 말찻오름 정상부엔 숲이 우거져 있어 올라가 숲속을 걷다 내려오지만 붉은오름 꼭대기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제법 멀리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선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오름을 볼 수 있다. 자연휴양림에 이어 오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