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덤’ 종영②] 걸그룹이 자신의 무대를 만들 때

[‘퀸덤’ 종영②] 걸그룹이 자신의 무대를 만들 때

걸그룹이 자신의 무대를 만들 때

기사승인 2019-11-01 08:00:00

그룹 (여자)아이들의 리더 전소연은 Mnet ‘퀸덤’의 마지막 경연곡 ‘라이언’(Lion)을 쓰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왕좌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모든 싸움과 인내 그리고 상처가 고스란히 가사로 새겨져 있다”는 곡 소개는 Mnet ‘프로듀스101’과 ‘언프리티랩스타3’를 거치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투쟁했던 전소연의 지난날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제 부정할 수 없어. 아임 어 퀸(I’m a queen)”이란 가사처럼, 전소연은 지금 가장 전도유망한 아티스트 중 하나다. 보이그룹이 점유해온 자전적인 서사와 ‘스웨그’의 영역은 “다듬지 못한 발톱으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개척”해온 전소연의 것이 됐다.

여성 아이돌이 스스로를 프로듀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난달 31일 종영한 ‘퀸덤’은 그에 대한 답을 보여줬다. 청순, 귀여움, 섹시, 걸크러쉬 등 한정적이던 여성 아이돌들의 콘셉트는 이야기성이 강화되면서 보다 풍부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여자)아이들이 세 번째 사전 경연 2라운드에서 선보인 ‘싫다고 말해’가 대표적이다. 원곡은 애절한 이별 발라드지만, 전소연이 기괴함을 테마로 무대를 꾸미면서 광기와 집착의 노래가 됐다. 몽환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소스들이 마구 겹치며 분노와 슬픔이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보여주고, 좀비 같은 모습의 남성 안무가들까지 등장하면서 떠나려는 연인을 죽게 만든 여자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여자)아이들의 무대는 음악과 퍼포먼스, 비주얼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가리키는 종합 예술이다. 

사전 경연에서 두 번이나 1위를 차지했던 오마이걸도 프로듀싱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팀이다. 세 번째 경연 2라운드에서 우승을 안겨다 준 ‘트와일라잇’(Twilight) 무대에서 오마이걸은 흡혈귀로 분했다. 가사에 등장하는 ‘13일의 금요일’, ‘유령’ 등의 소재에 착안한, 멤버 지호의 아이디어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동화적 장치로 활용해 귀엽고 발랄한 분위기를 강조했던 원곡과 달리, ‘퀸덤’ 무대에선 더욱 미묘한 뉘앙스를 보여준다. 어둡고 기괴하면서도 원곡의 경쾌함은 살려 한편의 잔혹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반면 ‘데스티니’(Destiny·원곡 러블리즈)는 국악기를 활용한 편곡으로 원곡의 아련함을 강조했다. 시대극을 연상시키는 비주얼과 고전문학 속 기다림의 정서를 옮겨놓은 듯한 음악이 짝사랑의 애틋함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AOA의 두 번째 경연곡 ‘너나 해’가 있다. 바지 정장을 입은 모습을 ‘퀸덤’은 ‘반전 매력’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무대는 섹스 심볼로 여겨지던 AOA의 지난날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지 않을 수 없다. 이기적인 연인에게 경고하는 원곡의 가사는 AOA 자신들의 이야기처럼 받아 들여진다. 그리고 ‘너나 해’를 연 멤버 지민의 랩(“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아임 더 트리(I’m the tree)”)은 이 무대의 방향성을 더욱 확고하게 드러낸다. 한 통신사가 내세운 등신대 덕에 남성에겐 섹시스타 여성에겐 워너비 몸매로 우상화돼온 설현은 이 노래 말미에 “내 멋대로 할래”라며 웃는다. 적어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그는 다른 이를 흡족하게 만들기 위해 미소 짓지 않는다. 

보이그룹의 음반과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세계관이나 서사성이 주목받았다. 반면 걸그룹의 음악은 몇 가지의 콘셉트로 설명되곤 했고, 그 콘셉트를 구현하는 건 대부분 시각적인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퀸덤’ 안에서 걸그룹이 스스로 프로듀싱한 무대들은 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자)아이들의 수진이 여성 안무가와 탱고를 추면서 ‘섹시’에서 남성을 배제할 때 덮치는 통쾌함, 마마무가 ‘아이 미스 유’(I miss you)를 자신들의 성장사로 소화할 때 밀려오는 감동, 지민이 ‘질투나요 베이비’에 덧붙인 랩이 남성 중심의 힙합 경연 프로그램과 겹쳐질 때 느껴지는 짜릿함은 ‘퀸덤’이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현은 이 프로그램 우승팀 특전이 ‘단독 컴백쇼’라는 얘기를 듣자 “(단독 컴백쇼는)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며 결의를 다졌다. ‘퀸덤’이 끝난 지금, 앞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보이그룹이 출연해 경쟁하는 ‘킹덤’이 아니라, 걸그룹들이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다. 자신을 원하는 방식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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