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나고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쉬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What happens / when it’s over / When we’ve breathed / our last breath) 지난달 30일 공개된 가수 에릭남의 신곡 ‘러브 다이 영’(Love Die Young)은 삶이 끝난 후의 일을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래는 이별을 앞둔 남자가 연인에게 ‘사랑이 일찍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지만, 에릭남은 ‘사랑’(Love)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열정, 꿈, 인생을 투영했다. 첫 영어음반 발매를 앞둔 지난 13일 서울 강남대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에릭남이 들려준 얘기다.
‘러브 다이 영’은 에릭남이 지난 7월 슬럼프를 겪으면서 만든 노래다. 당시는 에릭남이 18일간 12회 공연하는 일정의 유럽 투어를 마친 때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아직 달래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닥친 건 일, 일, 일, 끝없는 일뿐이었다. 피곤에 절어있던 에릭남에게 누군가 ‘어떤 노래를 쓰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너무 지쳤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그는 이런 이야기를 ‘러브 다이 영’에 담았다. ‘너를 잃지 않고 싶다’는 주문이 통한 걸까. 에릭남은 “‘러브 다이 영’의 가사를 쓰면서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곡은 14일 발표된 에릭남의 첫 영어 음반 ‘비포 위 비긴’(Before We Begin)에도 실렸다. 에릭남은 본격적인 글로벌 진출에 앞서 “맛보기” 격으로 이 음반을 낸다고 했다. “‘에릭남이라는 가수가 있고,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라고 소개하는 느낌이에요. 우선 반응을 보면서 좀 더 큰 프로젝트로 이어갈 기회를 바라고 있죠.” 타이틀곡은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마크 이 매시(Marc E. Bassy)가 피처링한 ‘콩그레츄레이션스’(Congratulations). “미국에서 먹히는” 코드인데다가, 노래를 듣는 사람마다 ‘이게 에릭남 맞아요?’라며 신선하게 받아들여 타이틀곡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내에선 ‘봄인가봐’ 같은 노래가 인기였지만, 사실 저와 제일 안 맞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솔직히’를 냈을 땐 ‘에릭남 왜 이래?’ 하시는 분들도 계셨죠. 하지만 저는 자신이 경험하거나 원하는 것들을 계속 표현하면서, 스타일도 계속 바뀌는 게 솔직하고 당당한 아티스트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음반은 여러 스타일의 음악으로 채우려고 했어요. 외국의 대중이 제일 좋아하는 에릭남의 색깔은 무엇인지 테스트해보고 싶었거든요.”
국내에선 ‘엄친아’로 불리며 만인의 사랑을 받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에릭남은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도 이 동양인 남자에겐 냉혹했다. “왜 한국에서 먼저 데뷔했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그런데 한국만 제게 기회를 줬어요.” 에릭남은 “미국 콘텐츠의 영향력은 전 세계적인데, 그 안에 동양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지난해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무료 상영회를 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25년 만에 동양인 캐스트로 만들어진 영화였어요. 많지 않은 기회고, 그래서 이 기회를 잡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에릭남은 K팝에 대한 편견과도 싸운다. ‘K팝은 군무를 곁들인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라는 인식을 깨고 “K팝의 깊이와 폭”을 넓히려는 것이다. 실제 에릭남은 미국에서 ‘당신의 음악은 팝인가, K팝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이상, K팝은 나와 뗄 수 없는 브랜드”라면서도 “K팝에 다양한 아티스트가 많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가 무너뜨린 국경을 넘어, 방탄소년단·블랙핑크가 먼저 닦은 길을 타고 에릭남은 더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는 ‘세계무대 공략’이란 말 대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줄 만한 음반”이라고 ‘비포 위 비긴’을 소개했다. 일견 겸손의 표현 같지만 인종, 언어, 국적을 막론한 보편적 기호와 공감대를 얻어내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이번 음반에 ‘하우 엠 아이 두잉’(How`m I Doing)이란 노래가 있어요. 연인에게 ‘나 지금 잘하고 있어?’라고 묻는 사랑 노래이지만, 한편으론 음악가로서 제 이야기이기도 해요. 여러분에게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이게 괜찮나요?’라고 묻고 싶었어요. 저 스스로도 ‘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질문을 늘 던지고 있기도 하고요. 지금은 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저 자체로 받아들여주시는 게 제일 좋아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