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일 맨의 꼼꼼한 빗질에 말끔해지는 낙엽길-
-10월에서 12월은 낙엽과의 전쟁-
-“수고한다”는 한마디에 힘 불끈-
-공무관(구 환경미화원)은 도전해볼만한 직업-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송파구 자원순환과 소속 공무관(구 환경미화원· 이하 공무관) 박태은(53) 씨가 매일 거리의 낙엽을 쓸며 즐겨 부르는 복음송이다.
박 씨는 아직 동이 트지 않는 첫 새벽, 자신이 청소하는 도로 옆으로 대형 화물차가 지나가자 본인도 모르게 인도 위로 몸을 피했다.
“요즘처럼 일이 많은 계절, 청소에 열중하다 보면 아무리 눈에 잘 띄는 형광색 근무복을 입고 있어도 자신 옆으로 경적을 울리며 대형차량이 빠르게 지나치면 깜짝 놀라 식은땀이 납니다.” 박 씨는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쓸고 쓸어도 쉼 없이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에는 새벽 5시가 출근시간이지만 대부분의 공무관들은 서둘러 집을 나선다.
박 공무관이 맡은 구역은 올림픽공원역 앞에서 보성고와 서문교회를 지나 서하남IC 까지 왕복 4.2km 구간이다. 몸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박 씨는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터에 나선다. 작업 중간 중간 편의점, 식당, 교회 등에서 따뜻한 커피와 음료를 제공해줘 늘 감사한 마음이다. 오고가는 구민들이 박 씨에게 밝은 미소와 함께 “수고하신다.”는 말 한마디에 힘이 솟는다고 한다. 이따금 동물사체를 치우거나 토사물 처리하는 일이 공무관들로서는 힘든 부분이다.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매연과 먼지, 힘든 빗자루 질에 팔, 어깨, 허리의 근육통도 어쩔 수 없는 대다수 공무관들의 직업병이다.
특히 10월에서 12월, 공무관들이 수거한 엄청난 양의 낙엽은 골칫거리다. 다행히 송파구는 지난 2012년부터 남이섬 중앙에 늘어선 100미터 남짓한 거리에 ‘송파 은행길’이라는 이름으로 은행잎 20t을 제공하고 있다. 나머지 500여t은 전국 농가에 특용작물의 보온재나 친환경 농사용 퇴비로 제공한다.
박 공무관은 시민들에게 낙엽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낙엽에 일반 쓰레기를 버리지 말 것을 부탁한다. 대부분의 자치구에서는 낙엽에서 일반 쓰레기를 분리하기가 어려워 소각하거나 매립한다.
매일 매일이 낙엽과의 전쟁이지만 박 공무관은 어떤 일을 해도 이 정도 어려움 없이 나라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겠냐며 소탈하게 웃었다. 박 씨는 자신이 열심히 일한 만큼 거리도 깨끗해지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운동이라 생각하면서 땀 흘려 빗자루 질을 하면 정신도 맑아진다고 했다.
힘들 때가 있으면 반드시 좋은 날도 있는 법. 그래도 어느 계절이 공무관으로서 업무가 수월 하느냐는 질문에 “공무관들에게 꿈의 계절은 초봄이란다. 3,4월은 새싹이 돋는 계절이라 물론 낙엽도 없고 쓰레기도 별로 없어 가장 여유로운 시기”라며 웃었다.
박 씨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아직도 우리 공무관을 낮추어보는 일부 시선에 씁씁할 때도 있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충분히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일한만한 직업”이라며 “특히 눈, 비, 태풍 등 비상시 거리로 달려나가 막힌 하수구도 뚫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 관련 부서에 긴급히 연락해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실 박 씨는 이제 공무관 생활을 시작한 지 이년도 채 안 된 새내기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했다는 박 씨는 그래서 현재 자신의 직업이 더욱 소중하다.
대학 졸업 후 엘리베이터 제작 하청회사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박 씨는 이후 볼링용품 수입업체에서 3년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로 인해 문을 닫게 되자 회사 영업망을 인수해 다시 회사를 키워나갔다. 기억하기 싫지만 1997년 11월 IMF의 시련은 박 씨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900원에 수입 오더를 낸 볼링공이 3개월 후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환율의 영향으로 무려 1,500원 가까이 오르고 관련 업체들도 문을 닫으면서 박 씨 역시 큰 빚을 떠안고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이제 막 결혼도 해서 첫 아이가 백일이 지날 무렵이었다. 박 공무관은 이를 악물었다. 지인의 소개로 동국대학교에서 자판기 관리 일을 맡았다. 아침부터 자판기를 청소하고 물을 갈고 부족한 제품도 채워 넣었다. 부지런히 학교에서의 일과를 마친 후 저녁 5시부터 밤 10시까지는 왕십리의 한 식당에서 주차관리 일을 했다. 이어서 밤 10시 반부터 새벽 4시까지는 닭 배달을 했다. 그렇게 낮밤 가리지 않고 일을 해 일 년 만에 일억 가까운 빚을 모두 갚았다.
시 감상이 취미인 박 공무관은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S. Pushkin)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는 시를 읊조리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고 회상한다.
성실과 긍정이 삶의 지표인 박 씨는 이후 청담동의 한 대형 식당에서 주차관리와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착실히 돈을 모았다. 그의 성실성과 깔끔한 외모, 손님을 대하는 매너를 눈여겨 본 강남의 한 대형 헤어스튜디오 원장이 그를 스카웃해 박 씨는 이곳에서 주차와 시설물 관리를 하며 10여 년간 착실히 일했다. 손님들은 헤어숍 원장만큼 사교성이 뛰어나고 서글서글한 인상에다가 중절모에 나비넥타이, 흰 구두를 신은 박 씨를 기억해 단골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박 공무관은 특히 자신을 신앙의 길로 인도해주고 전세자금까지 무상으로 빌려준 원장이 고마워 평생 이곳에서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아내의 적극 권유로 현재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생인 큰아들은 “아버지는 스마일 맨이다.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사람을 대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세 자녀가 원하는 건 다 해주셨다.”면서 “늘 안전에 신경 쓰면서 일해주시길 바란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 공무관은 은퇴 후 꿈은 시비와 노래비를 찾아 전국을 여행하는 것이다.
“신경림 시인을 제일 좋아해요. 시비와 노래비 앞에 서서 여유롭게 감상하고 주변도 스케치해서 시평집을 한권 내보고 싶어요. 그전까지는 가족과 몸담고 있는 직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요.” 서문교회 앞에서 새벽부터 낙엽과의 한바탕 전쟁을 치른 박 공무관은 헬멧을 벗고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흠치며 환하게 웃었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