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네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1-25 04:35:57

정오 무렵 리가의 구시가로 돌아왔다. 스웨덴 문(Zviedru vārti) 옆에 있는 식당 에지티스 미그라(Ezītis miglā, 번역기를 돌려보니 ‘안개 속의 고슴도치’란다)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인요리는 쌀밥을 곁들인 돼지고기 구이였지만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벽에 적힌 “When I met you flowers started growing in the darkest parts of my mind”라는 글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너를 만났을 때 내 마음의 심연에서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라고 직역하면 너무 건조할까?

스웨덴 문은 1698년에 리가 성벽에 낸 성문으로 성 밖에 있던 스웨덴 수비대의 막사로 나가는 문이었다.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걸쳐 축조된 리가 성벽에 있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다. 

커트 발란더(Kurt Wallander)라는 경찰관을 등장시킨 범죄수사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스웨덴 작가 헤닝 만켈(Henning Georg Mankell)의 소설 ‘리가의 개(Hundarna i Riga)’에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스웨덴 문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스웨덴 문이 있던 장소에는 부유한 상인의 집이 있었다. 당시 리가시는 외부에서 들여오는 물품에 세금을 부과했다. 상인은 집을 허물고 성문을 짓는 조건으로 세금을 면제해달라고 리가시에 제안을 했다. 협상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곳에 성문이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골목길에 들어서면 성 야곱 성당(Rīgas Svētā Jēkaba Romas katoļu katedrāle)을 만난다. 리가 최초의 가톨릭성당이며, 로마 가톨릭의 리가대교구의 대주교좌 성당이었으나 리가대성당이 건립되면서 그 역할을 넘겨줬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독일 루터교 소속이 됐다가 1923년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다.

길이 약 50m이며 종탑의 높이 86m인 비교적 작은 교회이며 1225년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한 교회는 1300년 무렵 완공됐는데, 2층과 탑의 위쪽은 15세기 말에 완성됐다. 교회 탑에 십자가가 아니라 수탉으로 장식한 것이 독특하다.

성 야곱 성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라트비아의 의회인 사에이마(Saeima) 건물이다. 라트비아 의회는 100석의 비례대표로 구성되는데, 투표에서 5%이상 득표를 한 정당에 의석이 배정된다. 의회건물에서 성 야곱 성당 앞을 지나면 골목 끝에 삼 형제(Trīs Brāļi)라는 집이 있다.

각각 마자필스(Maza Pils) 거리 17, 19, 21번지에 해당하는 세 집은 리가의 구시가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들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17번지 건물은 15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까마귀 발자국 모양의 박공, 고딕 장식, 그리고 초기 르네상스적인 세부사항이 특징이다. 

내부는 커다란 방 하나와 창고로 사용되는 다락방으로 구성됐다. 당시에는 창문의 크기에 따라 세금이 부과됐기 때문에 작은 창문을 몇 개 냈을 뿐이다. 1955~1957년 사이에 건축가 사울리티스(P. Saulītis)와 얀손스(G. Jansons) 등이 복원했다. 

가운데 있는 19번지의 집은 1646년에 지은 것으로 네덜란드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1746년에 석조로 된 입구가 추가됐다. 오늘날에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이 들어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21번지의 집은 18세기 후반에 바로크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세 건물은 딱 붙어있어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건축양식의 변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삼형제의 집이라는 이름은 이웃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세 자매의 집에서 유래한 것이다. 

20세기 들어 삼형제의 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세 건물의 뒤뜰을 통합했다. 철거한 주택의 다양한 석조 입구와 블루 가드 무기고에 있던 리가 시의 문장을 마당 벽에 넣었다. 삼형제의 집이 있는 예카바 거리(jēkaba iela)를 왼쪽으로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돌면, 리가 성당(Rīgas Doms)이 있는 돔 광장(Doma laukums)이다. 리가 구시가에서 가장 큰 광장이다. 돔 광장에는 예카바 거리 등 7개의 길이 모인다. 

1885년 돔 광장(Domes laukumu, 두아메스 라우쿠무)으로 불렀다가, 1923년에 돔 광장(Doma laukumu, 두아마 라우쿠무)로 바뀌었다. 1937년 예카바 거리, 성 거리, 야우니엘라 거리가 만나는 작은 광장을 조성하여 5월 15일 광장이라고 불렀다. 1940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병합한 뒤 두 광장을 통합해 6월 17일 광장으로 바꿨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라트비아를 점령했을 때 다시 돔 광장(Domplatz) 그리고 알베르트 폰 북스회브덴(Albert-von-Buxhoevden) 광장이라고 불렀다. 전후 6월 17일 광장이라고 부르던 것을 1987년부터는 돔 광장(Doma laukums)으로 부르고 있다. 돔 광장에는 리가의 구시가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돔 광장에 있는 리가 성당(Rīgas Doms)은 복음주의 루터교 성당으로 리가 대주교가 주석하고 있다. 독일 니더작센(Niedersachsen) 출신의 리보니아 주교 알베르트(Alberts fon Buksthēvdens)가 1211년 지은 성당이 불타고, 1215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해 1226년 완공된 것이다. 

처음에는 3개의 반아치형 금고가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이었던 것을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을 비롯해 회중석이 더해졌다. 처음에는 2개의 탑을 세울 계획이었지만 자금부족으로 하나의 탑만 지었고, 이마저도 1547년에 불탔다. 1595년에 나무와 돌로 만든 140m 높이의 탑을 세웠다. 당시 리가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목재 부분이 퇴락했기 때문에 1775년에 90m 높이의 바로크 양식 탑을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소련이 지배하던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성당의 제단을 철거하고 콘서트 홀로 사용했다. 1991년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한 뒤에는 다시 복음주의 루터교회 소속이 됐다.

리가 성당 맞은편에 라트비아 라디오방송국(Latvijas Radio)이 있다. 1925년 11월 1일 개국한 라트비아 방송은 모두 6개의 채널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군이 리가를 침공해 올 때, 리가 라디오방송국에 근무하던 아나운서는 적군이 방송국을 점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송마이크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라트비아 사람들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라트비아 라디오방송국 방송국 앞, 광장 바닥에서 리가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동판을 볼 수 있다.

라트비아 라디오방송국 옆에 있는 붉은색 건물은 리가 증권 거래소(Rīgas birža)이다. 독일출신으로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하랄드 율리우스 보세(Harald Julius Bosse)가 베네치아 르네상스 궁전 양식으로 설계해 1852~1855년 사이에 지었다. 1920년부터는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의 분관으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외국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로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서유럽 및 동양 예술품들이며, 서유럽 예술작품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라트비아 라디오방송국 앞을 지나면서 리가 성당건물의 왼쪽으로 난 좁은 골목, 로제나(Rozena) 거리를 따라 들어가면 골목 끝에 허름한 건물이 있다. 로젠그랄스(Rozengrāls)라는 이름의 중세풍 식당이다. 쇠로 만든 뒤주, 술통, 나무로 만든 바퀴를 단 마차 등 중세풍이 물씬 나는 물건들이 밖에 있고 나무로 만든 문이 닫혀 있는데, 문에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문이 있다. 문을 두드리면 작은 쪽문을 열어 신분을 확인한 다음에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에 들어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전등이 없어 컴컴한 가운데 촛불이 휘황하다. 

1293년의 문서에도 기록돼있다는 이 식당은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주 저장고이며 리가 시의회의 축제 장소였다고 한다. 식당은 지하에 있는데 높이 4m의 아치형의 홀의 벽에는 1201년에 축조된 최초의 리가성벽의 조각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5개의 방에는 모두 150명이 동시에 입장이 가능하고, 중세풍의 옷을 입은 점원들이 음식을 내오고 깜짝쇼도 한다. 

라트비아 라디오방송국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 말거리(Zirgu iela)로 들어서 골목 끝까지 가면 노랑색 5층 건물이 나타난다. 고양이 집(Kaķu nams)이다. 1층에 올림픽 카지노가 들어선 건물의 양쪽 지붕에는 원뿔형 첨탑이 올려져있고, 탑 꼭대기에는 네발을 모은 위태로운 모습의 고양이가 서있다.

이 건물은 프리드리히 쉐펠(Friedrich Scheffel)이 아르누보 양식으로 설계해 1909년에 지었다. 건물 옥상의 첨탑 위에 세운 고양이들은 처음에는 지금과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첫 번째는 건물주인 라트비아 상인이 리가의 대 길드(Lielā ģilde)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대길드 O먹어라’는 의미였을까? 고양이 집 건너편에 사무실이 있던, 리가의 대길드는 1354년에 설립돼 1939년까지 존재했다. 대길드는 “우정, 양질의 생활, 음주, 자선 및 영혼을 키우는 것”을 사명으로 했다고 전한다. 

두 번째 이유는 건물주인 라트비아 상인이 리가시 의회와 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시의회 건물이 대길드와 같은 방향이었다고 한다. 훗날 건물주는 옥상의 고양이를 지금처럼 대길드를 바라보도록 고쳐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고양이 집이 있는 마이스타루(Meistaru) 거리를 따라 왼쪽으로 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 원통형의 탑이 나온다. 화약탑(Pulvertornis)이다. 지름 14.3m, 높이 25.5m, 두께 약 3m인 탑은 리가요새의 핵심 구조로 동쪽으로 난 도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1330년에 언급될 당시에는 모래 탑이라고 불렀는데, 탑의 맞은편에 모래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지상 5m에 있고 좁은 계단을 통해야 했다.  견고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1621년과 1650년의 스웨덴이 공격해왔을 때 지하실 일부만이 파괴됐을 뿐이다. 1650년부터는 화약을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화약탑이라고 부르게 됐다. 말발굽 모양으로 된 탑의 도시쪽 벽은 나무로 지었다.

탑에는 모두 11문의 대포가 설치돼 있었다. 5층과 6층 사이에는 3층 두께의 참나무와 소나무로 된 천장을 뒀다. 1883년까지 교도소, 고문실, 무기가 있었다. 1919년에 라트비아의 소총 연대 박물관을 설치했다가 독립 후에는 라트비아 전쟁 박물관으로 개명했다. 

발트해 지역의 군사 활동과 관련해 수세기에 걸친 자료를 비롯해, 독립 후 라트비아군이 참여한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대 러시아 저항운동과 관련된 일장기도 걸려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이름도 있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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