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2-11 02:35:48

[쿠키뉴스] = 리가 대성당의 동쪽 건물은 리가 역사와 해운 박물관(Rīgas vēstures un kuģniecības muzejs)이다. 1773년 리가의 의사 니콜라우스 폰 힘셀(Nikolaus von Himsel)의 개인 소장품으로 출발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가운데 하나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수집을 하다 보니 리가의 역사에 관한 것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경내에는 1778년에 만든 고전주의 양식의 기둥으로 된 홀이 있다. 1890년대에 리가 대성당을 재건하면서 수도원의 일부를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리가 역사상 처음 지은 박물관 건물이다.

소장품은 고대 리가 마을에 관한 물건, 12~13세기 항구에서 사용된 물건, 13~16세기 한자동맹 시기와 16~17세기 폴란드와 스웨덴 통치기간의 리가에 관한 물건들이다. 또한 1918 ~1940년까지 라트비아 독립의 첫 시기에 리가 시민들의 삶에 관한 물건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라트비아의 해운 역사에 관한 자료도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리가의 옛 모습, 지도, 은 세공품 및 도자기, 선박 모델, 항해 도구,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 의류, 장식 등 50만여개의 물품이 포함된다.

리가 역사와 해운 박물관은 붉은 추기경이라는 유령이야기도 전해온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 혹은 장소에 출몰한다는 유령이야기가 한 토막씩은 있기 마련이다. 밤늦게 박물관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묘한 느낌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존재가 정체를 드러낸 것은 박물관 개관 200주년을 앞둔 1973년 2월이었다.

개관식을 준비하던 2명의 직원이 밤늦게 3층에서 청소를 하다가, 빨간 벨벳 망토를 입은 키 큰 남자의 형상이 책장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형상에는 머리가 없었다. 그 형상은 두 사람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문 쪽으로 향했다. 무거운 나무문이 조용히 열리고 그 형상은 방밖으로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등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붉은 추기경이라고 부르는 이 유령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리가 대성당에서 성 거리(Pils iela)를 따라 대통령궁으로 사용하고 있는 리가 성(Rīgas pils)으로 가다보면 급하게 꺾인 도로의 모퉁이에 있는 건물의 벽에 벽감을 만들고 그 안에 물동이를 쥔 소녀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누가 왜 만들었는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오가는 여행객들의 사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소녀상을 지나면 골목 안에 영국 성공회에 속하는 성 구세주 교회(Anglikāņu Sv. Pestītāja baznīca)가 있다. 발트 독일 건축가 요한 펠스코(Johann Felsko)가 신고딕 양식으로 설계한 것으로, 1853년 착공했지만 크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됐다. 1857년 붉은 벽돌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축자재를 영국에서 들여와 교회를 다시 짓기 시작해 1859년에 완공됐다.

성 구세주교회에서 조금 더 가서 삼거리를 지나면 외벽이 하얀 교회를 만난다. ‘슬픔의 성모 교회(Rīgas Sāpju Dievmātes Romas katoļu baznīca)’다. 1785년에 초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1522년 리가 시의회는 길드의 지원을 받는 안드레아수 크놉키(Andreasu Knopki)를 루터교 목회자로 임명했다. 

루터교회는 기존의 가톨릭교회를 접수해갔는데, 1539년에는 4개의 수도원과 가톨릭교회를 모두 차지했다. 1621년부터 로마 가톨릭교회는 죽음으로 금지됐다. 1710년이 돼서야 스웨덴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제국이 리가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1780년 리가를 방문한 신성로마제국의 요세프 2세 황제는 가톨릭교회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지원을 약속했다. 교회 건설은 1784년에 시작돼 1785년에 완료됐다. 리보니아 종교 개혁 이후 최초의 가톨릭교회인 이 교회의 건설에 리가시 수석건축가 하베르란트(K. Haberland)가 간여했을 것이라 한다. 교회의 길이는 28.4m, 폭은 14m, 높이는 12m로 고전주의 양식에 따라 시원한 녹색-흰색으로 채색돼있다. 

교회의 탑은 제단 위에 세웠고, 꼭대기는 반구형으로 닫았다. 이 무렵 리가에서 지어진 다른 교회의 탑보다 낮았다. 교회의 지붕은 주석으로 덮었다. 교회에는 5개의 대리석 제단이 있었다. 1858~1860년 사이에 건축가 요한 펠스코(Johann Felsko)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교회의 노회가 남서쪽으로 옮겨졌고, 교회 외관은 로마네스코 양식과 비슷하게 지었다.

슬픔의 성모 교회를 지나면 바로 리가 성(Rīgas pils)이다. 리가 성은 리가 사람들과 튜턴기사단의 리가 지부인 리보니안 기사단 사이의 내전(12971330년)이 끝난 뒤에 체결한 평화조약에 근거해 1330년에 지었다. 성 베드로 성당 인근에 있는 컨벤션 코트에 있던 원래의 리가성은 내전 기간 중에 리가사람들이 파괴했다. 리보니안 기사단은 원래의 성을 재건하기 보다는 도시의 경계 너머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기로 했다. 지금의 자리에 있던 성령병원과 성신 수녀원이 부지로 선택됐고, 수녀원은 원래의 성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새로운 리가 성은 1340년대 후반에 완성됐고, 당시 리보니아 기사단의 최고지도자 에베르하르트 폰 몬하임(Eberhard von Monheim)의 이름에 따라 몬하이마스 에베르하르다(Monheimas Eberharda) 궁전으로 불렀다. 15세기 들어서도 리가 사람들과 리보니아 기사단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성이 파괴되자 1481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최고지도자 베른트 폰 데르 보어(Bernd von der Bohr)는 체수 성(Cēsu pils)으로 이주했다

 1484년 내전으로 리가 성은 다시 완전히 파괴됐다. 1491~1515년 사이에 옛 성의 기초 위에 성을 재건했다. 1562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마지막 최고 책임자 고타드 케틀러(Gothard Kettler)는 폴란드 왕, 니콜라스 라지윌(Nicholas Radziwill 에게 리가 기사단을 넘기면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해체했다. 이후 리가성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소유가 됐다. 1621년에 스웨덴이 리가를 점령하면서 스웨덴왕국으로 성이 넘어갔다.

18세기 초에 러시아제국이 리가를 차지하면서 1795년부터는 리가 주지사(Vidzeme)의 관저가 됐다. 1919년 여름 라트비아 독립전쟁 기간 중에 리가 성은 대통령과 총리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1940년에는 라트비아의 PSR 인민위원회가 사용했다. 라트비아 독립 이후 1994년부터 라트비아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2013년 6월 20일 저녁, 발생한 화재로 약 3200㎡에 달하는 면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됐다. 성의 지붕과 다락방 2000㎡, 4층의 600㎡, 3층과 200㎡ 등이다. 레드 홀은 거의 완전히 타 버렸고, 화이트홀은 심하게 손상을 입었다. 명예의 전당, 메신저 홀 및 국장 홀 등도 피해를 입었다. 박물관 등의 소장품은 화재로부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물로 인해 파손됐다. 

17세기에는 성 전체를 해자로 둘러쌀 계획이었다. 원래의 성은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모서리에 4개의 직사각형 탑을 세운 3층 건물이었다. 1491년 성을 재건하면서 남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2개의 직사각형 탑을 커다란 둥근 탑으로 대체했다. 성벽의 두께는 약 3m다.

중세 이후 건설된 밝은 탑(Erkera tornis)이 추가돼 지금은 6개의 탑이 있다. 궁전의 안뜰에는 ‘@정보버’의 뛰어난 후기

 고딕 양식에 매너리즘 양식을 결합한 ‘월터 폰 플레튼버그 기사단장(Mestrs Valters fon Pletenbergs, 1515)’와 ‘성모자(Madonna ar bērnu, 1515)’라는 부조가 있다.

대통령궁까지 구경하는 호사를 누린 다음 래디슨 블루 호텔로 향했다. 리가에서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다. 래디슨 블루 호텔로 가기 위해 다우가바 강변을 지나는데 강 건너에 있는 라트비아 국립도서관(Latvijas Nacionālā bibliotēka)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을 지난다. 

라트비아 국립 도서관은 1918년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한 뒤인 1919년에 설립됐다. 최초의 사서 겸 서지학자인 야니스 미신스 (Jānis Misiņš)가 기증한 개인 소장품을 바탕으로 했지만, 1920년까지 소장한 책은 25만권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부터 모든 출판사들이 출판한 책들을 제출하도록 했다. 1939~1940년 사이에 주립 도서관은 발트 독일인의 많은 도서관과 소장품을 인수했다. 1940년의 소장규모는 170만권으로 늘어 구시가의 2곳에 보관해야했다. 

1941~1944년 사이 독일군이 리가를 점령한 사이 주립 도서관은 국가도서관(Zmes bibliotēka)으로 개명했다. 소비에트 통치 시절에는 라트비아 PSR의 주립 도서관(Latvijas PSR Valsts bibliotēka)으로 불렀다. 1991년 독립 이후에는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으로 부른다. 현재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은 14세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약 1만8000 ‘여’ 건의 필사본을 포함하여 5백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논의는 1928년부터 있어오다가 2008년 다우가바 강의 왼쪽 둑에 새로 짓기 시작했다. 이 공사의 설계는 1989년에 이미 라트비아계 미국인 건축가 군나르 비르케르츠(Gunnar Birkerts)가 마쳤던 것이다. 2014년 68m 높이의 13층 건물의 공사가 완공돼 5곳에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었다.

건물이 완공된 뒤에 리가사람들은 국립도서관이 여성의 가슴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유방조영술로 찍은 방사선 사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일반사람들이 보아서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리가 사람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모양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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