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두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3-13 09:13:47

시청 건물 앞에 있는 분수대에는 우산을 쓰고 키스를 하는 젊은 남녀의 동상이 서있다. 분수대는 1948년에 조성됐고, 마티 카르민(Mati Karmin)이 제작한 ‘키스하는 학생(The Kissing Students)’ 조각은 1998년에 설치된 것이다. 2006년에는 분수대에 카우나스, 웁살라, 탐페레, 투루 등 타르투의 자매도시들의 이름을 새긴 타일을 붙였다. 타일에는 그들 도시의 방향과 거리가 표시돼있다. 김영만 가이드에 따르면 매년 광장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키스를 잘 하는 커플을 뽑아 해외여행을 보내준다고 한다. 

‘키스하는 학생’의 전설이 전해온다. 어느 가을 사랑에 빠진 두 학생이 구시가의 어두운 거리를 걸어 시청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남학생은 우산을 펴 여학생을 안아 들이고 키스를 했다. 두 젊은이는 오랫동안 키스를 했고, 여학생은 키스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같은 그들의 사랑이 하늘에 이르렀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쳤고 두 사람은 석화되고 말았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전설이다. 비가 내리면 우산에서 작고 빨간 하트가 떨어진다고 했다.

짧은 자유시간에 시청광장에서 서쪽으로 난 퀴니(Küüni) 거리를 따라 구경하기로 했다. 퀴니 거리에는 거리에 탁자를 내놓은 식당들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는 타르투 중앙공원(Tartu Keskpark)이 있다. 중앙공원 초입에는 에스토니아 조각가 울로 운(Ülo Õun)이 1977년에 조각한 ‘아버지와 아들(Isa ja poeg)’의 청동상이 서있다. 조각가의 미망인 이나라 운(Inara Õun)에 따르면, 18개월 된 아들 크리스티안(Kristjan)을 돌보는 소년과 조각가 자신을 모델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것을 2001년 가을 타르투시가 구입해 2004년 6월 1일, 어린이 보호의 날에 이곳에서 공개했다. 통통한 모습의 아이는 어른의 키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크게 표현돼있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다. 조각가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세대 간의 관계를 나타내려 했다고 한다.

버스를 타러 시청광장을 따라 큰길로 이동하다 보니 노란색을 한 사각형 액자를 볼 수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이 설치한 노란색 창(NG yellow window)이다. ‘노란색 창’ 사업은 네덜란드 그로닝겐(Oost Groningen) 동부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그로닝겐은 독일과의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네덜란드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그로닝겐(Oost Groningen)의 지도자들, 그리고 지역사회 및 자연보호단체가 연합해 지역을 알리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기획됐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노란색 액자는 마치 열린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찍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동 그로닝겐에서의 사업은 성공을 거둬 1년 반 만에 지역 관광매출이 두 배가 됐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노란색 창 사업을 적극 수용해,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에 모두 28개의 노란색 창을 설치했다. 타르투 시청광장을 비롯해, 라트비아와의 국경마을, 발가, 트라베레(Tõravere)에 있는 타르투 천문대, 바스트셀리나(Vastseliina)의 성공회 성터 등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노란색 창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도 있다. 일명 물개섬으로 알려진 두이커(Duiker)섬으로 가는 유람선이 떠나는 호트 베이(Hout bay) 선착장에 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에도 소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입을 검토하면 좋을 것 같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노란색 창 건너편에는 타르투 미술관(Tartu Kunstimuuseum)이 있다. 1940년 설립된 타르투 미술관은 남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술관이다. 주로 시각 예술가를 중심으로 하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구성된 팔라스 예술가협회(kunstiühingu Pallas)이 주도해 기증받은 4만4650점(2014년 기준)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은 주로 에스토니아 예술과 18세기부터 현재까지 에스토니아 관련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다. 최근에는 현대미술 작품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타르투 시청 부근에서 우왕좌왕하느라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모이기로 한 6시가 가까워져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황색창이 서있는 도로를 건너면 에마수기 강에 놓인 아치교(Kaarsild)가 나온다. 타르투 시내의 중심가와 울레호(Ulejõe) 지구를 연결하는 보행자다리다. 페테르 바레프(Peeter Varep)의 설계로 1957~1959년 사이에 건설됐다. 57.4m 길이의 다리에는 2.25m 폭의 보도 2개가 있고, 가운데 세워진 아치는 1m 간격으로 기둥을 세웠는데, 가장 높은 기둥은 8m 높이다. 

타르투 대학교의 학생들 사이에는 적어도 한 차례의 시험을 통과하고 다리를 건너야 학생자격을 인정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몇 년 전에는 아치 아래 설치한 조명이 밤에는 색조가 변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또한 2018년에는 에스토니아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향기기가 설치됐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다리에서 20m 정도 떨어진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지금도 작은 배가 나루에 매어있다. 

6시 반에 모여 숙소로 이동했다. 이날 숙소는 ‘실리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니린(Ränilinn) 지구에 있는 소피아 호텔이다. 마침 숙소 옆에 꽤나 큰 루나게스코스(Lõunakeskus) 쇼핑몰이 있어 짐을 풀어놓고 구경을 나갔다. 운동화에 문제가 생겨 새로 사야 했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산 뒤에 몰 구경을 하다 보니 커다란 아이스링크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아이스하키 경기가 한창이었다. 북구의 나라답게 빙상경기가 활발한 듯했다. 

잠시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일찍 먹은 탓인지 야식을 먹어야 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소면을 먹었다. 컵라면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날 저녁을 일찍 먹게 된 것은 식당에서 6시 이후에는 음식을 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저녁을 일찍 먹고 구경을 하는 일정으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야식을 먹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귀국하는 항공편의 좌석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2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소리에 깼다. 먼저 2시 45분에 열리는 폴란드항공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탈린-바르샤바 구간의 비행기 좌석을 정하고, 다시 5시 30분에 열리는 폴란드항공의 바르샤바-인천 구간의 비행기 좌석을 정해야 했다. 다행히 바르샤바-인천 구간까지 연결해서 좌석을 정할 수 있었다. 

좌석지정은 잘 마쳤지만,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1시간 가까이 일정을 정리하다보니 다시 졸려왔다. 결국 4시 반쯤 다시 잠들었다가 6시 반에 따로 맞춰둔 알람소리에 깨 샤워를 하고는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아침식단은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에 비해 차림이 간략했지만 커피 맛이 좋아 용서할 만했다. 

발트여행 7일째다. 이날은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여름별장이 있어 에스토니아의 여름 수도라는 별명이 있는 패르누(Pärnu)와 합살루(Haapsalu)를 거쳐 수도 탈린(Tallinn)까지 가는, 꽤나 빡빡한 여정이다. 그래선지 전날보다 30분 빠른 8시 반에 숙소를 출발했다.

숙소를 나서는데 선뜻한 느낌까지 든다. 기온이 14℃다. 서울은 여전히 30℃가 넘는 무더운 날씨라는데 피서는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타르투에는 구름이 엷게 깔려있는데 패르누는 오후 1시에 비가 예고돼있었다.

그리고 보니 타르투 소개를 빠트렸다.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남동쪽으로 186㎞,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북동쪽으로 245㎞ 떨어진 에스토니아 동부지방에 위치한다. 2019년 기준, 인구수는 9만3865명으로 에스토니아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탈린이 에스토니아의 정치 및 금융의 중심지라고 하면 타르투는 지적 중심지라고 할만하다.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타르투 대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2016년 10월에는 에스토니아 대법원, 교육부, 그리고 에스토니아 국립박물관이 타르투에 자리 잡았다. 타르투가 에마여기 강의 아테네(Emajõe Ateena)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은 탈린에서 매 5년마다 7월이면 열리는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laulupidu)가 1869년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축제 개최지는 1896년 탈린으로 옮겨졌으며, 지난 2019년에는 1020팀에서 3만2302명이 출연하는 대규모 행사가 됐다.

1918년 독립 이후 에스토니아어 이름인 타르투(Tartu)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도시에 붙은 첫 이름은 러시아어로 유리에프(Юрьев)였으며, 독일어로는 도르파트(Dorpat), 라트비아어로는 테르바타(Tērbata), 핀란드어로는 타르또(Tartto)였다. 

그런가 하면 타르투(Tartu)라는 이름이 스칸디나비아의 신, 토르(Thor) 혹은 에스토니아의 신, 타라(Taara)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멸종된 고대 소를 이르는 타르바(tarva)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2개의 호수를 동서로 연결하는 에마여기 강을 건너는 남북도로에서 중요한 장소다. ‘어머니 강’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마여기(Emajõgi) 강은 에스토니아 남부의 중앙에 있는 보르츠야르브(Võrtsjärv) 호수에서 흘러나와 러시아와의 국경에 있는 페입시(Peipsi) 호수로 흘러가는 100㎞ 길의 강으로 에스토니아에서는 9번째로 긴 강이다. 

서기 700년 무렵 에마여기 강의 나루를 굽어보는 성당 언덕에 나무로 요새가 세워졌다. 1030년 키에프의 왕자 야로슬라프 1세(Ярослав Мудрый)가 침공해 요새를 세웠다. 13세기 초에는 리가 주교와 리보니아 기사단인 검의 형제단이 침공해 점령했다. 이후 타르투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무역을 맡아 호황을 누렸다. 당시 4개의 수도원과 8개의 교회가 있었다. 

타르투의 번영은 리보니아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로는 러시아, 폴란드, 독일, 스웨덴 등 주변 열강들이 각축하는 가운데 힘의 균형에 따라 지배의 주체가 바뀌는 세월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무난히 넘긴 타르투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소비에트에 속한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다가 1960년대부터 주택개발이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 그리고 독립을 이룬 이후부터 도시는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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