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지현준이 꿈꾸는 ‘보이지 않는 배우’

[쿠키인터뷰] 지현준이 꿈꾸는 ‘보이지 않는 배우’

지현준이 꿈꾸는 ‘보이지 않는 배우’

기사승인 2020-04-25 08: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배우 문소리는 이 사람을 두고 “좋은 사람이 연기를 잘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보여주는” 배우라고 했다. 배우 고두심은 이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했단다. 주인공은 바로 배우 지현준. 연극 무대에서 16년 동안 활동해오던 그는 지난 11일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재벌 2세 하찬호를 연기하며 안방극장 관객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주인공 정금자를 연기한 배우 김혜수도 일찍부터 지현준을 ‘‘하이에나’에서 가장 주목받게 될 배우’로 꼽았다.

“배우 인생의 또 다른 길이 열린 느낌이에요.” ‘하이에나’ 종영 이후 서울 월드컵북로 쿠키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지현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가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연극·뮤지컬·무용 등 제가 경험해왔던 것들을 충분히 (카메라 연기에도) 가져올 수 있겠다, 나만의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아요.”

셔츠 벗고 머리 적시고…지현준이 만든 하찬호

이슘 그룹 후계자인 하찬호는 유약한 망나니다. 내연녀 서정화(이주연)가 없으면 제정신으로 살지 못한다. 그가 하는 말은 주로 “서정화는 지금 어딨어?”나 “당장 서정화 데려와!”나 “서정화아아아!!!”뿐이며, 무슨 이유에선지 머리카락은 늘 젖어있고 웃옷도 입지 않은 채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 있다. 지현준은 ‘노(no) 셔츠’ 차림으로 노래하는 가수 벤자민 클레멘타인과 영화 ‘레옹’ 속 배우 게리 올드만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하찬호의 비주얼을 완성했다고 한다. 흔한 ‘막장 재벌 2세’와 차별화를 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지현준은 오디션을 통해 하찬호 역에 발탁됐다. ‘술만 먹은 하찬호’ ‘약을 요만큼만 먹은 하찬호’ ‘약을 이만~큼 먹은 하찬호’를 두루 보여준 끝에 배역을 따냈다. 데뷔 16년 차인 그에게도 카메라에 적응할 시간은 필요했다. “제 얼굴이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어요. 주변 동료들에게도 ‘너흰 도대체 어떻게 (연기를) 하는 거야?’ 묻고 다녔죠.” 그의 마음을 다잡게 한 건 지인의 조언이었다. ‘네가 네 얼굴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부터 너는 자유로워질 거야.’ 지현준은 그 순간 ‘됐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하찬호의 이면이 잘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자신의 환경 안에 살면서 실수도 하고 힘든 일에 부닥쳐 나락에 빠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건 참 쉽지만, 그의 이면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 안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하찬호에겐 그 한 사람이 정금자였어요. 정금자를 통해 하찬호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잘 캐치되길 바랐습니다.” 

청년 지현준 “진짜와 가까운 뭔가가 있겠다”

정금자를 만난 하찬호가 달라졌듯, 지현준도 타인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 경험이 있다. 1인 35역의 모노드라마 ‘나는 나의 아내다’(2014)의 강량원 연출 덕분이었다. 지현준은 ‘당신은 당신의 꿈을 꿔라. 내가 그 꿈에 같이 들어가겠다’던 강 연출의 말을 아직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강 연출과 함께 ‘나는 나의 아내다’를 만들면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쥐여 주는 게 제 역할이 아니더라고요. 관객들이 그들의 삶에서 작품을 바라보게끔 열어놓는 게 제 몫이구나 싶었어요.” 데뷔 11년 만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지현준은 2003년 연극 ‘햄릿’으로 연기에 발을 들였다. 그의 시작이야말로 한 편의 연극 같다. KBS에 입사해 다큐멘터리 PD가 된 그는 그러나 일주일 만에 편집실을 뛰쳐 나왔다. 편집실 도처에 널려 있던 자장면 그릇과 양말들을 보며 ‘내 인생이 여기에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고민했다. ‘안 잘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백발이 되어서도,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그게 연기, 바로 연기였다.

하지만 처음 하는 연기가 쉬울 리 없었다. 지현준은 “머리로 계산하던 삶이 개박살 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남들 앞에, 홀딱 벗은 채 서 있는 느낌. “(감정을) 숨기면 숨긴다고 혼나고, 아니면 아닌 척 한다고 혼나고. 연기를 할 때마다 속내가 들통이 났어요.” 창피한데, 한편으론 가슴이 뜨거워졌다. ‘진짜와 가까운 뭔가가 있겠구나’ 청년 지현준은 그렇게 연기에 빠져들었다.

“보이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

무대에서 그는 화가 이중섭이 됐고(‘길 떠나는 가족’), 살로메를 매혹한 세례 요한이 됐으며(‘클럽 살로메’),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농부(‘시련’)가 됐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쉬운 작품이 없었다. 지현준은 “내 고민과 맞닿는 작품,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들이 좋다”고 했다. 그는 내년 초 배우 문소리와 함께 연극 ‘빛의 제국’을 들고 유럽 투어를 떠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작곡가 겸 음악감독 정재일과 고전을 해석한 작품을 올릴 예정이다.

“연기를 하다 보면, 누군가를 통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 생겨요. 그 순간을 만나면 제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기분이 들죠. 그게 제가 연기를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에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온전하게 이해해 보는 거, 그게 삶에서도 엄청난 원동력이 돼요.”

빛날 현에 빛날 준. 지현준은 ‘이름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빛으로 누군가를 비춰줄 수 있는 사람.” 그는 한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스스로를 뽐내는 것 같아 쑥스럽다고 느끼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젠 “난 지현준이고, 소중한 사람이고, 무한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주 심플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두려워 말고 피하지도 말고 내 길을 가보자’고, 지현준은 다짐한다.

“‘보이지 않는 배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두 명의 대배우가 달을 가리키는 동작을 하면, 한 분의 연기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관객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다른 한 분의 연기는 관객들이 달을 보게 만든대요. 책에선 ‘너는 어떤 배우가 될래?’라고 묻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앞에 나서서 뽐내고 인정받는 건 달콤한 일이죠.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빛을 비추고 사라져야 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배우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배우, 사라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wild37@kukinews.com / 사진=박효상 기자, SBS ‘하이에나’ 방송화면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