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인세현 기자=영화 ‘사냥의 시간’(감독 윤성현)에서 주인공들을 쫓는 한(박해수)은 좀처럼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다. 시종일관 나긋한 목소리로 예의 바른 존댓말을 쓰지만, 이조차도 사냥꾼이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감정을 배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을 거듭하는 얼굴엔 표정이 없고 인간을 사냥하는 총구엔 거침이 없다. “윤성현 감독과 상의했던, 제가 그리고 싶었던 한은 서스펜스 장르 그 자체였어요. 이유를 모르고 쫓기는 자들의 극대화된 공포감, 그 자체를 표현하고 싶었죠.” 최근 화상으로 이루어진 라운드 인터뷰에서 배우 박해수는 자신이 연기한 한을 이처럼 설명했다.
“한의 전사는 영화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한의 몸이나 머물던 방에서 그의 과거를 엿볼 수 있죠. 전쟁 경험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전직 특수부대요원이라는 설정이에요. 그런 인물이 고요한 상태로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마치 죽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요. 누군가를 쫓거나 죽여야만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연기하려 했어요.”
‘사냥의 시간’은 영화 ‘파수꾼’으로 찬사를 받았던 윤성현 감독이 9년 만에 내놓는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윤 감독은 박해수가 무대에 선 연극을 보러 와 그에게 직접 ‘사냥의 시간’ 대본을 건넸다. 박해수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얼굴을 알리기 전의 일이다. 윤 감독은 박해수에게 한 역할을 제안하며 어떤 말을 했을까.
“역할을 제안받고 첫 미팅을 위해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저를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해서 윤 감독님께 물어봤어요. 그때 윤 감독님께서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미지의 얼굴이다’ ‘악역을 해도 품격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에 남아요. 정중하면서도 품격 있는 태도로 공포감을 주는 인물. 그게 윤 감독님이 생각한 한이었던 거죠.”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자체를 연기하기 위해 외형적인 부분부터 바꿨다.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일 정도로 체중을 감량해 몸을 만들었다. 내면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박해수는 “어떤 것을 제약받았을 때 오는 심리적인 상태를 끌어내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역할의 성격 때문에 현장에서 배우들과 일부러 밀접하게 지내지 않았어요. 모니터룸이 아닌 촬영장 구석에 홀로 있는 식이었죠. 한은 건강하고 큰 에너지가 아닌, 뒤틀리고 폭력적인 에너지로 꽉 차 있는 냉철한 인물이니까요. 끊임없이 그런 에너지를 증폭시키다가 함축해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굉장히 치열하고 뜨거운 현장이었기 때문에 매 순간, 모든 장면이 기억에 남을 정도예요.”
‘사냥의 시간’ 시나리오를 접하고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박해수에게도 여러 일이 있었다. 인기 드라마 주연으로 사랑받았고, 영화 ‘양자물리학’으로 제40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트로피를 품에 안기도 했다. 박해수는 “신인상을 받고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고, 앞선 캐릭터들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다. 영화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역할이라서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한을 연기하며 그 순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퍼부었기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은 있다”고 힘줘 말했다.
“요즘 ‘슬기로운 의사생활’ 덕분에 ‘슬기로운 감빵생활’도 다시 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사냥의 시간’의 한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니까 관객들이 보시기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캐릭터나 장르를 규정하고 작품을 선택하진 않아요. 주어지는 대본이 좋으면 감독님이 가진 상상력 안에서 놀아보고 싶은 배우죠. 그렇게 주어지는 것들을 잘 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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