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30 01:00:00

린다메 공원을 오른편으로 하고 걷다보면 작은 건물이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에스토니아 선거관리위원회 건물이다. 사거리에서 린다메(Lindamäe) 공원, 주지사 정원(Kuberneri aed), 사령관의 정원(Komandandi aed), 하르유메(Harjumäe) 공원 등 4개의 공원이 만나고 있으니 공원 안 사거리인 셈이다. 

하르유메 공원은 잉거 요새(Ingeri bastion)의 자리에 조성된 것이다. 17세기 지역을 지배하던 스웨덴 왕국은 러시아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탈린에 11개의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 잉거 요새는 린다메 공원 자리에 있던 스웨덴 요새와 함께 탈린 방어의 한축을 담당했다. 사거리에는 1991년 8월 20일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자그마한 바위돌이라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야트막한 하르유메 공원에 오르면 언덕 동쪽 아래에 독립전쟁 전승기념탑(Vabadussõja võidusammas)이 서있다. 143개의 유리블록으로 구성된 높이 23.5m의 기념탑은 에스토니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모든 사람들에게 헌정된 것이다. 

탈린 시의회는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뒤 자유 광장(Vabaduse väljak)에 있던 표트르 1세의 기념비를 철거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922년 표트르 1세의 동상을 철거하면서도 기념비는 건설하지 못했었다.

탑은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뒤 10년이 지난 2001년 다시 논의된 끝에 2009년에 개막을 볼 수 있었다. 자유 광장 건너편에 있는 교회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딕 양식의 성 요한 교회(Jaani kirik)다. 탈린의 건축가 크리스토프 아우구스트 가블러(Christoph August Gabler)의 설계로 1862~1867년 사이에 세워졌다. 

하르유메 공원에서 사령관의 정원으로 건너가면 ‘키엑 인 데 콕(Kiek in de Kök)’이라고 부르는 1475년에 지어진 포탑을 만난다. 탑에 오르면 인근에 있는 집들의 부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포탑 벽의 두께는 4m, 높이는 38m에 달한다. 1577년에 제작된 대포를 볼 수 있다. 1760년 이후에 방치됐다가 20세기에 복원됐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마름모꼴의 붉은 지붕을 얹고 있는 정방형 탑은 ‘네이치토른(Neitsitorn)’, 즉 ‘처녀의 탑’이다. 생뚱맞아 보이는 이름인데, 이곳 사령관이었던 힌제 메게(Hinse Meghe)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사령관의 이름이 영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maiden(처녀)으로 옮겨진 것이다. 네이치토른을 포함하는 4개의 탑과 그 아래 있는 덴마크왕의 정원에는 유령에 관한 많은 전설이 내려와 매주 목요일 저녁 9시에 시작하는 유령관광(Ghost tour)이 있을 정도다.

네이치토른을 지나면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Aleksander Nevski katedraal)에 이른다. 러시아 제국이 에스토니아를 다스리던 1894~1900년 사이에 건설된 신 러시아 양식의 대성당이다. 신 러시아 양식은 19세기 후반에 비잔틴 양식의 요소를 러시아 건축에 접목한 건축양식이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활동한 건축가 미하일 프레오브라젠스키(Mikhail Preobrazhensky)가 설계한 이 성당은 탈린에서 가장 큰 정통 큐폴라 양식의 건물이다.

핀란드 화강암으로 지은 건물에는 5개의 돔을 얹고 금으로 도금한 철 십자가를 올렸다. 3개의 제단이 있는데, 북쪽 제단은 10세기 말 키에프 왕국을 다스린 블라디미르 대왕에게 헌정됐으며, 남쪽 제단은 러시아 정교에서 존경받는 성인의 하나인 세르기 라도네즈스키 성인에게 헌정된 것이다.

성당 안에는 4개의 아이콘상자와 3개의 금박을 입힌 나무 아이콘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된 것이다.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된 11개의 종이 있는데, 가장 큰 종의 무게는 약 16톤에 달한다. 많은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 성당을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 혐오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1924부터 이 성당을 철거하려했지만 자금사정으로 미뤄오고 있다.

대성당은 1241년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국경에 있는 페입시 호수(Peipsi järv)에서 벌어진 얼음전투(Jääinging)에서 승리한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성인에게 헌정된 것이다. 1224년 에스토니아의 남부를 점령하고 타르투에 자리 잡은 헤르만(Hermann) 주교는 리보니아 기사단에 에스토니아 사람들을 보강해 노브고로드 공국(Новгоро́д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을 공격했다. 

성립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2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기까지 핀란드만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한 노브고로드 공국은 정교를 믿고 있어 북유럽 십자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네브스키의 보병은 두꺼운 갑옷을 입은 헤르만 주교의 기병을 포위해 격파했는데, 얼음전투는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네브스키는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고 블라디미르에 있는 성모 탄생 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죽음 후 여러 차례 기적이 일어났다. 1380년 쿨리코보 전투(Куликовская битва)가 발발하기 전에 계시를 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유해가 썩지 않아 성인으로 간주됐으며, 1547년 러시아 정교회의 마카리우스(Макарий) 총대주교에 의해 시성됐다. 에스토니아의 탈린 이외에도 불가리아의 소피아, 폴란드의 우치 등 수많은 성당과 교회가 네브스키 성인에게 헌정됐다.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의 왼쪽으로 로씨(Lossi) 광장이 있고, 광장 서쪽 붉은 지붕에 연분홍으로 외벽을 단장한 기다란 건물이 현재 에스토니아 의회(Riigikogu)가 쓰고 있는 톰페아 성(Toompea loss)이다. 톰페아는 린다가 옮겨온 바위라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앞서 소개한 바 있는데, 고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외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언덕에 정착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전설로 추정된다.

각설하고 1219년 덴마크왕국의 발데마르 2세(Valdemar II)이 덴마크 십자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톰페아를 점령했다. 덴마크 사람들이 쌓은 성은 라틴어로 ‘덴마크사람들의 성’을 뜻하는 카스트룸 다노룸(Castrum Danorum)이라고 불렀고, 이를 에스토니아어로 옮기면서 타아닐리누스(Taanilinnus)라고 불렀다. 

1227년에 리보니아의 칼의 형제 기사단이 점령했다가 10년 뒤에 다시 덴마크왕국에 돌려줬다. 1346년 덴마크왕은 튜턴기사단에 팔려 중세 무렵까지 튜턴기사단의 소유였다. 튜턴기사단이 가톨릭계였기 때문에 톰페아 성은 아무래도 예배당, 회의실, 기사 숙소 등이 있는 수도원을 닮은 구조였다.

16세기 리보니아 전쟁이 끝난 뒤에 이 지역을 차지한 스웨덴왕국은 십자군이 요새로 사용하던 성을 행정적인 정치권력의 중심으로 바꿨다. 하지만 1710년 스웨덴왕국으로부터 에스토니아를 차지한 러시아제국은 성을 재건해 궁전으로 만들었다. 요한 슐츠(Johann Schultz)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물이 성단지의 동쪽 날개 부분에 추가돼 총독관저로 사용했다. 1918년 에스토니아의 독립과 함께 의회가 사용하고 있다.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과 에스토니아 의회 사이에 있는 톰 콜리(Toom-Kooli) 거리를 따라 한 블록을 올라가다보면 에스토니아 음악과 극장 아카데미의 연극학교(Eesti Muusika- ja Teatriakadeemia lavakunstikool)가 나온다. 벽에 손목이 튀어나온 현판이 붙어있어 쉽게 눈에 띈다. 오른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쳐든 현판의 주인공은 20세기 초반 탈린주립 음악학교의 공연예술 부서를 이끈 배우이자, 연극교사이고 감독이던 볼데마르 판소(Voldemar Panso)다.

연극학교를 지나면 돔교회(Toomkirik)라고도 부르는 성모 성당이 나온다. 바로크 양식의 종탑이 인상적인 중세풍 교회이다. 탈린은 물론 에스토니아 본토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톰페아를 차지한 덴마크 사람들이 1219년에 나무로 된 교회를 처음 세웠다. 

1229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도착해서는 오래된 목조건물을 대신한 석조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단과 충돌이 일어나 수도사들이 죽는 바람에 교회건설이 중단됐다가 1240년에서야 완공되어 성모에게 헌정됐다. 단층의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 직사각형의 교회였다. 1330년에 통로를 3개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지만, 29m 길이의 교회가 완공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1684년 톰페아에 큰 화재로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교회는 화재로 소실된 교회 내부의 복원에 나섰고, 에스토니아 조각가 크리스티안 아케르만(Christian Ackermann)이 1868년에는 사도의 모습을, 그리고 1896년에는 주 제단을 제작했다. 본당 서쪽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첨탑은 1778~1779년 사이에 세운 것이다. 

교회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면 코투오차 전망대(Kohtuotsa vaateplatvorm)에 이른다. 톰페아의 북쪽 끝에는 코투오차 전망대와 파트쿨리 전망대(Patkuli Vaateplatvorm)가 있다. 우리가 찾은 코투오차 전망대에 서면 가깝게는 톰페아의 우거진 숲 사이로 서 있는 집들의 붉은 지붕이 선명하고, 멀리는 탈린만이 손에 잡힐 듯하다. 

탈린만에는 커다란 크루즈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구가 있고 서쪽으로는 수상비행기가 내리던 항구가 있다. 마침 크루즈선박이 한 척 입항했다는데 그래선지 코투오차 전망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탈린항에 4척의 크루즈선박이 입항했을 때는 거리에 사람이 넘쳐 걸을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 틈을 겨우 뚫고 전망대의 난간에 접근해서는 탈린만 쪽으로 파노라마 사진을 한 장 찍고 나니 눈치가 보인다.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보니 코투오차 전망대의 왼쪽 끝에 있는 기념품 가게(Hansa Suveniirid OÜ)의 벽에는 ‘The Times we had’라고 적혀 있고, 바로 그 앞에서 찍은 인증샷이 탈린에 왔다간 여행객들의 인스타그램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전망대에 사람들이 넘쳐서 보지 못한 줄 알았는데, 자료를 더 찾아보니 2018년 5월경에 가게 주인이 페인트로 덧칠을 해서 지웠다고 한다. 문구를 지운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망대의 난간 위에 올라앉아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코투오차 전망대에 새겨진 문구의 의미는 물론 이 문구를 새긴 이유 등에 대한 설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마다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모양이다. 간단하게 ‘우리가 가진 시간들’이라고 직역하면 너무 밋밋할 것 같아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이라고 옮겨보면 어떨까 싶다.

자료를 찾다보면 미국 버지니아 출신 컨트리 싱어, 테일러 레이 홀브룩(Taylor Ray Holbrook)이 부른 노래 ‘Times we had’가 있다. 노래는 전망대의 문구처럼 “또 만나면 언제나 널 사랑해 내 친구 / 아직도 나는 우리가 가진 시간에 감사해(When I see you again, I'll always love you my friend / Yet I'm thankful for the times we had)”라고 끝나며 헤어진 옛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코투오차 전망대는 열려 있는 공간이므로 누구나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짜인 일정대로 움직이는 우리와 달리 자유여행으로 이곳에 오면 근사한 일출 혹은 일몰, 그리고 야경을 감상할 수 있겠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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