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애비규환’(감독 최하나)의 토일(정수정)은 최근 한국영화에 등장한 20대 중 가장 속 시원한 캐릭터다. ‘애비규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토일에서 시작해 토일로 끝난다. 주변 인물들은 토일의 선택을 뒤쫓거나 멍하게 바라볼 뿐이다.
토일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결정하거나 기존 관습을 따르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도 없던 것처럼 거침없이 자신의 앞길을 헤쳐 가는 인물이다. 예상치 못한 임신을 겪어도 당황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5개월을 기다렸다가 부모님 앞에서 향후 5주년 계획을 당당하게 발표한다. 부모님의 반대를 마주치자 곧바로 집을 나가 친부를 찾는 식이다. 남들이 고민과 절망에 빠질 일도 당연하다는 듯 앞장서서 말을 뱉고 행동에 옮기는 토일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토일의 극중 캐릭터도 인상적이지만 그를 연기한 가수 겸 배우 정수정에게 눈길이 간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하는 정수정은 지금껏 기다려왔던 역할인 것처럼 자유롭고 대범하게 토일의 이야기를 전한다. 많은 관객들이 ‘애비규환’이 정말 정수정의 영화 첫 주연작이 맞는지 찾아보지 않을까. 최근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정수정은 ‘애비규환’의 대본을 읽자마자 “저 할게요”라고 전화했다고 말했다.
“대본이 한 번에 훅 읽혔어요. 처음에 임신부 역할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물음표였죠. 대본을 읽고 나서 바로 다시 전화해서 ‘저 할게요’라고 했어요. 그 이후엔 고민도 없었고, 걱정이나 부담감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났어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땐 지금 영화의 토일이보다 센 느낌으로 받아들였어요. 이걸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고민하며 많이 조정하고 톤을 잡아가는 연습도 했어요. 말을 세게 하면 미워 보일 수 있겠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토일이에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는 토일이를 보면서 어렸으니까 그럴 수 있고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된 것 같아요.”
가족에게 임신 사실을 숨기는 토일이의 모습은 실제 정수정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영화 속 토일이와 반대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혼자 모든 걸 해내려는 토일이에게 짠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토일이가 임신 사실을 가족들에게 5개월 동안 숨기잖아요. 어떻게 그러는지 이해를 못했거든요. 전 절대 그럴 수 없어요. 토일이와 반대로 전 곧바로 엄마에게 달려갈 것 같아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도 있겠지만, 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에게 도움 받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고민이 생기면 공유하고 여기저기 물어봐요. 혼자 고민하는 것 보다 여럿인 게 낫잖아요. 토일이는 혼자 해내려고 하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자체가 정말 짠하죠. 제 친구가 그랬으면 ‘왜 혼자 이걸 다해?’라고 하면서 도와주고 싶을 것 같아요. 혼자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온 시간이 힘들었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은 느낌이 들었죠.”
‘애비규환’은 임신 5개월에 접어든 토일이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불룩 나온 배를 붙잡은 채 끊임없이 걷고 뛰는 토일의 모습은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수정은 배가 나온 토일의 신체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임신부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앉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몰랐어요. 영상도 찾아봤고 실제 임신부 언니들의 이야기도 들었죠. 그래도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리를 못 오므리고 간단한 것도 힘들다는 얘길 들어도 그냥 편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싶었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가짜 배를 차기 시작했어요. 제가 보고 들었던 자세들이 정말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없던 게 앞에 생기니까 다리를 꼬거나 오므리거나 이런 자세가 안 돼요. 바닥에 앉아 있을 때도 불편하고요. 다리를 옆으로 해서 앉고 뒤를 받치는 자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사실 임신부들도 처음해보는 거잖아요. 저도 없던 게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정수정이 MBC ‘볼수록 애교만점’으로 처음 연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최근엔 OCN ‘써치’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선보일 정도로 활발히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자신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는지도 알게 됐다.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이런 작품을 할 거야’라고 계획한 적은 없어요. 본능적으로 끌리는 걸 했죠. 뒤돌아보니 제가 군인을 하고 임신부를 하고 여신도 했다가 야구선수의 여자 친구 역할도 했더라고요. 이렇게 보면 ‘내가 도전정신이 있나보다’란 생각이 들어요. 자꾸 새로운 걸 찾는 것 같아요. 저도 일할 때는 모르고 하다가 쌓인 작품들을 보니 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된 거죠. 모든 배우들처럼 저도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고 매번 고민해요. 정말 어려워요. 작품 시작 전에 늘 한 번씩 좌절도 하고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느끼죠. 제가 나온 작품이 소개됐을 때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고 싶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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