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속 후회하는 아버지들 [‘승리호’ 봤더니]

한국 영화 속 후회하는 아버지들 [‘승리호’ 봤더니]

한국 영화 속 후회하는 아버지들

기사승인 2021-02-20 07:00:11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지난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승리호’(감독 조성희)는 한국형 우주 SF를 개척했다는 찬사와 신파적인 연출이라는 질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배우 송중기가 연기한 주인공 김태호의 전사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족과 불화하던 아버지가 지난날을 후회하며 부성애를 발휘하는 서사는 한국 영화에서 자주 반복돼온 클리셰다. 그런데 ‘후회부친’ 서사의 약점은 빤하거나 신파적인 연출이 아니다. 진짜 결함은 자식의 입장을 배제한다는 데 있다. 자식들은 놀라울 정도의 포용력으로 아버지와 화해하지만, 정작 영화 안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는 것은 자식의 너그러움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래에 나오는 네 편의 영화는 후회하는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 영화 ‘승리호’, ‘부산행’, ‘염력’, ‘신과 함께-인과 연’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유행한 ‘가난해 보이는 연예인’을 글에서 기사 형식을 빌려왔습니다.

영화 ‘승리호’의 주인공 김태호(송중기).
몰락후회
: 몰락한 뒤 자식을 방치하다가 후회한다

영화 ‘승리호’의 김태호(송중기)는 제임스 설리반(리차드 아미티지)이 직접 선발한 기동대원으로 설리반의 명령에 따라 UTS에 불법 입국한 사람들을 처단하던 중 태어나 처음 본 아기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의 아빠가 된다. 딸 순이(오지율)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되고 기동대에서도 쫓겨난다. 업동이(유해진)의 표현처럼 “한 순간에 제일 꼭대기에서 완전 바닥으로 떨어진” 태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박장을 기웃대고, 순이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난다. 관심을 갈구하는 순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나가서 뭐 사먹고 와”라며 1달러를 건네는 식이다. 불의의 충돌 사고로 순이와 생이별하게 된 태호는 그 때부터 순이를 되찾기 위해 돈 버는 일에 혈안이 되지만, “제일 꼭대기”에 있을 때만 내리사랑을 발휘하던 자의 희생적인 부성애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것인가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색한 관계의 신석헌(류승룡)-신루미(심은경) 부녀.
도망후회
: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후회한다

영화 ‘염력’(감독 연상호)의 신루미(심은경)는 소녀가장이다. 아버지는 그가 열 살이었을 때 집을 나갔고, 함께 치킨집을 꾸리던 어머니마저 용역 깡패들의 손에 숨을 거둔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사도 모르고 살던 아버지 신석헌(류승룡)이 찾아와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갑자기 생긴 초능력 덕분에 딸을 부양할 수 있게 된 석헌은 의기양양하지만 루미의 반응은 싸늘하다. 석헌이 과거 친구의 빚보증을 섰다가 큰 빚을 지게 됐고 그로 인해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난 뒤 소식을 끊었기 때문이다. 석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하며 후회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루미의 오랜 상처를 치유할 수도, 그의 용서를 받아낼 수도 없다. 아버지에게 아버지만의 사정이 있듯, 자식에게도 자식만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화해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강문직(김명곤)은 사후 모습을 바꾼 채 염라로 일한다.
엄격후회
: 아들을 엄격하게 대했다가 후회한다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감독 김용화)의 강림(하정우)은 이승에서 아버지 강문직(김명곤)을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죄를 짓는다. 그는 의붓동생 해원맥(주지훈)은 총애하면서도 자신에겐 늘 엄격하던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강문직은 저승에서 염라 자리를 제안 받는데, 하필 그 때 자신의 시신을 찾으러 달려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강림의 모습을 본다. 슬픈 표정의 강문직, “다 내 탓이오”라며 후회에 젖는다. 염라 직을 수락한 그는 훗날 저승에 온 강림을 차사로 임명해 그가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준다. 1000년 뒤, 강림은 저승의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빈다. 하지만 살아생전 강림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래서 그 자신조차 ‘내 탓’이라며 괴로워했던 강문직은 강림에게 사과를 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남몰래 후회하는 것만으로도 ‘까방권’(까임 방지권)을 얻은 셈이다.

부산행 열차에서 좀비와 사투를 벌이는 석우(공유).
무심후회
: 자식에게 무심하게 굴다가 후회한다

영화 ‘부산행’(감독 연상호)의 석우(공유)는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로,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다. 아내와 이혼한 뒤 어머니(이주실)의 힘을 빌려 딸 수안(이수안)을 키우지만 육아엔 무심하다. 딸의 학예회를 놓치는 건 예삿일이고 생일선물이라며 건넨 게임기는 어린이날에 이미 선물했던 것과 같은 기종이다. 엄마를 만나러 부산에 가고 싶다는 수안의 요청에 석우는 이번에도 “다음에”를 말하지만, ‘혼자라도 가겠다’는 수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함께 부산행 열차에 오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좀비 사태로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석우는 결국 수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딸을 처음으로 품에 안던 날을 떠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석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당연한 진리를 자식뿐 아니라 아버지들도 되새겨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wild37@kukinews.com / 사진=넷플릭스, NEW,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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