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2편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2편

-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기사승인 2021-04-26 05:10:01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왕산 성곽길을 산책하는 시민들/
도심 빌딩 숲을 벗어나 한양도성 성곽길 산책에 나서 보자. 경복궁에서 10여분, 숭례문에서도 10여분 거리에 산이 있고 계곡이 있다. 온갖 소음과 공해 속 지친 몸과 마음을 바람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새소리가 위로해 준다.

- 무릎 꿇은 나라님의 절규 “소자의 부덕이면 벌을 내리옵소서!”
- 눈 녹은 곳을 경계로 성을 쌓다.
- 성곽길은 소통의 산책길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과 함께
그래픽=이정주 디자이너

[쿠키뉴스] 글·사진 곽경근 대기자 =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은 길이가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도시 서울을 익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한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은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따라서 사직단의 중심에는 건물이 아니라 텅 빈 제단이 자리잡고 있다. 사직단에는 왕릉에도 하나만 세우는 홍살문이 무려 8개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얼마나 신성한 장소인가를 알 수 있다.

(2)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가뭄에 시달려 고사하기 직전 이옵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이 하늘을 우러러 단비를 갈구하기 어느 덧 반 년 이옵니다.
임금된 자가 덕이 없으면 삼재팔난(三災八難)으로 나라를 괴롭힌다 하였으니
혹 이 소자 ‘도’(세종의 이름)의 부덕으로 인한 벌책을 내리시옴인저.
여기 염천에 면류관(冕旒冠)·곤룡포(袞龍袍)로 벌을 서옵나니
일체 허물을 ‘도’ 한 몸에 내리시고 단비를 점지해 주옵소서.“
세종 5년(1423년)에 전국적인 가뭄이 들었다. 산천초목이 메마르고 논바닥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작물이 타들어가도 가뭄은 해소될 기미가 없다. 세종은 마침내 그해 여름인 7월 13일,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 사직단(社稷壇)에서 위의 축문과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서 육조거리를 지나 인왕산으로 서서히 오르면 사직단 정문이 보인다.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진 반면, 일제강점기에 주변이 모두 훼손된 사직단은 여전히 한적한 장소로 남아 있다. 

기우제는 임금의 잘못된 정사를 하늘이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응징하는 것이란 오랜 믿음 때문에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임금과 문무백관들은 근신하면서 스스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비 내리기를 간구했다.

기우제를 올린 지 사흘 만에 비가 내리자 백성들은 칠년대한(七年大旱) 끝의 단비라며 감복하면서 성군(聖君)의 기우제 덕분이라 칭송한다. 비가 오고 안오고는 하늘의 뜻이지만 세종은 가뭄조차 ‘왕의 부덕’으로 돌렸다.
이후 세종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세종 23)를 발명하여 지역적· 계절별 강수량 통계를 내어 과학 영농의 기초를 닦았다.
조선의 왕들은 간절히 비를 바라는 기우제 뿐 아니라 비가 너무 많이 와 홍수가 나면 역으로 맑은 날을 기원하며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나라에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 역시 정월 상신일에 사직단에서 시작하였다.
사직단 전경/ 사직단(社稷壇)의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사직단은 제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았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사직이 다음, 왕이 가장 마지막"이라고 했다. 성리학을 받들었던 조선에서 사직은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 사직단은 어디에 있을까?
‘종묘사직을 걸고... 종사를 지키시려면...’ 한번쯤은 방송에서 들어본 낯익은 멘트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궁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가 사용하던 가장 흔한 단어다. 6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던 한양도성 안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은 경복궁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사직공원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넓은 뜰 안, 1단 높은 장대석기단(長大石基壇) 위에 정문을 세워 성지임을 표시하고 중앙에 같은 형태의 제단이 2개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사(社)인 토지신에게 제사 드리는 곳이고, 서쪽은 직(稷)으로 곡물신에 제사를 올렸다.

1394년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한 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가장 먼저 조영 한 것이 종묘, 사직과 궁궐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엔 사직단(左廟右社)이 있다.
왕은 살아서 궁에, 죽어서 능에 그리고 영혼은 종묘에 있어 신성한 공간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사직단은 백성을 위한, 백성들의 편안한 삶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신성한 공간이었다.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이 사직단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취재에 동행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은 “이 중요한 공간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파헤치기 위해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격을 낮추었다.”면서 “담장은 신작로를 지으며 없어지고, 유구는 신축 건물의 기초석으로 사용되었다. 사직단은 파헤쳐지고 축소되어 수영장과 놀이공원으로 격하되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지금은 종묘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된 사직단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경복궁과 경희궁 사이 현재 사직동 주민센터와 어린이 도서관 그리고 종로 도서관 및 황학정 아래까지 모두 사직단이었다. 다행히 한양도성이 살아나듯, 사직단도 복원정비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국궁 1번지 황학정 전경

- 고종이 활 쏘던 국궁 1번지, 황학정
왕의 신성한 공간 사직단을 벗어나 인왕산 성곽을 향하는 길, 사직단 북쪽에 ‘登科亭(등과정)’이란 각자가 새겨진 바위 앞 무사들의 활쏘기 연습장이었던 등과정 터가 있다. 인왕산 서촌에 있는 다섯 개의 활터 중 고종황제가 활을 쏘았던 국궁 1번지 황학정(黃鶴亭)이다. 고종은 활을 쏜 후 마치 한 마리 학처럼 의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난 2014년에는 우리 민족의 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체험관으로 구성된 국궁전시관을 개관하고 활쏘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복원 마치고 개관한 딜쿠샤 전경/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년∼1948년)의 가옥이다. 서울시는 2017년 딜쿠샤 고증 연구를 거쳐 2018년 복원 공사에 착수,  2021년 3·1절을 맞아 일반에게 공개했다.

- 성밖 행촌동, 딜쿠샤(DILKUSHA)와 권율 장군 집터 은행나무
도성 안과 도성 밖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도성 안은 궁과 궐이 있고, 종묘와 사직단이 있어 가는 곳마다 고요하다. 하지만 도성 밖은 성벽이 높고 험하다. 도성 밖 은행나무와 살구나무가 가득한 마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 보인다. 이 동네의 이름이 뭘까? 도성 밖에 500여 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100년이 가까운 가옥이 눈길을 끈다. 누구의 집일까? 가까이 가 보니 정초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딜쿠샤(등록문화재 제687호/ DILKUSHA·1923)는 산스크리트어로 ‘꿈의 궁전’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의미로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서양식 가옥이다.
1920년대 촬영된 딜쿠샤와 주변 모습, 권율장군 집터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현재는 딜쿠샤와 은행나무 주변으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옛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이 주는 웅장한 느낌보다 바로 옆, 권율 장군의 집터 안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살린 부부가 더욱 그리워진다. 앨버트 테일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미국인으로 금광 채굴 개발 엔지니어 겸 UPI 통신원으로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하고,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린 사람이다.
수령 4백년이 넘은 권율 장군 집터의 은행나무는 딜쿠샤와 마주하고 있다.

딜쿠샤와 은행나무는 도성 밖에 아직도 존재한다.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 노구의 몸으로 다시 찾은 도성 밖, 딜쿠샤와 500년을 지킨 행촌동(杏村洞)의 상징 은행나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앨버트 테일러가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딜쿠샤’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서울시에서 매입,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복원돼 지난 3월1일부터 전시관으로 개방되었다.


-황금색 호랑이상의 정체는
황학정을 지나 인왕산 성벽길 초입 도로변에 황금색 호랑이상이 있다. 이 호랑이 조형물 뒤로 군부대가 있어서 사람들은 부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은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 라는 오랜 역사 속에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산이 인왕산이다.
‘좌청룡 우백호’에 우백호가 바로 인왕산이다. 조선 태종 5년(1405) 7월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내정까지 들어왔고,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으며, 연산군 11년(1503)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세조는 친히 세 차례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는 속담과 이야기가 전해지니 혹시 인왕산 호랑이상이 전설 속 그 호랑이 인지 한번 인증샷을 남겨도 괜찮겠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 흥인지문 · 숭례문 · 돈의문이며 4소문은 창의문 · 혜화문 · 광희문 · 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일제강점기에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만들었다.

- 눈 녹은 곳을 따라 성을 쌓다.
오늘 날  한양도성은 성곽마을 주민들에게는 천혜의 트레킹 장소로 체력단련의 장이고, 성곽아래 직장인들에게는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동료사이 팀워크를 다질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지난 20일 점심시간에 찾은 한양도성 안과 밖에는 지역 주민은 물론 인근 직장인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내린다. 나무마다 연초록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성벽 돌담 아래 드문드문 피어난 봄꽃사이로 새소리 들으며 여유롭게 걷다보면 어느새 세상사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인왕산 성곽길에서 만난 직장인 김신민(41· 반포동) 씨는 “일주일에 2~3번은 점심시간에 성곽길을 오른다.”며 “오늘처럼 청명한 봄날에 동료와 함께 한양도성을 걷는 것은 보약 한 첩 보다 귀하다”고 말하며 동료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 성곽길 오르며 조선 건국초기 이야기를 들어본다.
최 소장과 함께 한양도성 밖 성벽을 따라 인왕산 선(禪)바위로 향했다. 인왕산 곡성(曲城)과 좌측으로 안산이 보이는 이곳은 600여 년 전 조선 건국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삼각산과 백악산 그리고 인왕산을 수십 번 오르며 한양의 위치를 잡아야했다. 1395년(태조4년), 백악산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것인가? 왕사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이 마지막까지 논쟁을 펼쳤던 곳이 인왕산 범바위 아래 선바위다.
인왕산 선바위 전경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넣을 것인가? 도성 밖으로 뺄 것인가? 팽팽한 의견 대립이 있었던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최종 결정은 태조 이성계의 몫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태조 이성계는 눈이 녹는 쪽에 한양도성을 쌓기로 하였다. 인왕산은 해지는 서산이고, 선바위는 눈이 녹지 않아 도성 밖으로 밀려나갔다. 삼봉 정도전의 한판승이었다. 한양도성 안은 유교의 나라가 되어 도성을 설성(雪城)이라 부르고, 바위는 선(禪)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삼각산과 이어진 백악산, 백악산과 인왕산이 한 몸처럼 서쪽의 안산(鞍山)까지 연결되어 목멱산(남산)까지 붙어있는 듯하다. 인왕산의 세 봉우리는 성곽으로 연결되어 창의문을 지나 백악산 성곽으로 이어지며 한양을 지킨다. 한양도성은 600년 서울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일상에 지친 도시인에게 오늘도 생기를 불어 넣는다.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랜기간인 511년 동안(1396~1907)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

곽경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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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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