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 그리고 차변과 대변[정동운의 영화 속 경제 이야기]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 그리고 차변과 대변[정동운의 영화 속 경제 이야기]

정동운(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기사승인 2022-03-02 09:39:17
정동운 전 대전과기대 교수
우리들은 2분법적인 극단논리에 빠져 살 때가 많다. 2분법적 사고란, 어떤 대상을 흑과 백, 긍정과 부정, 선과 악,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 등의 두 가지 대립되는 상황을 설정하여 양자택일을 하고, 어떤 중간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영화<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은 원제로 보면 ‘도전적인 사람들’ 혹은 ‘반항적인 사람들’이라고 번역해야 옳지만, 제목에서부터 ‘흑백논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폭풍우가 치는 어느 밤, 범죄자 호송차량이 산길을 달리던 중 마주오던 차를 피하려다 빗길에 사고를 당한다. 그 와중에 죄수 백인 조커 잭슨(토니 커티스 분)과 흑인 노아 컬렌(시드니 포이티어)이 두꺼운 사슬에 손목을 같이 묶인 채로 도주를 시작한다. 이 두 도망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종상의 적대감을 제쳐놓고 상대방의 생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하기 위해 달리는 화물기차를 미친 듯이 쫓아간다. 노아는 움직이는 기차에 올라타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조커를 움직이는 기차로 잡아끌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려옴으로써, 자신만의 자유를 포기한다. 자기만 탈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그들을 추적하는 경찰견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데도 불구하고, 노아는 ‘Long Gone’을 부른다. 짧은 순간이나마 자유를 만끽한다. 결국, 탈옥은 실패하지만 생존을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눈뜨게 되는 두 인종 간의 진정한 이해와 우정을 통하여 비로소 둘은 하나가 된다.

회계학에서 거래(경제적 사건)를 기록하기 위한 두 축은 바로 차변과 대변이다. 도로교통법상 ‘사람은 왼쪽, 차는 오른쪽’으로 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회계에서는 왼쪽을 차변(借邊, debit)이라 하여 (차) 또는 Dr.이라는 약자로 표시하고, 오른쪽을 대변(貸邊, credit)이라 하여 (대) 또는 Cr.이라는 약자로 표시한다.


물리학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복식부기의 기본구조에도 이와 비슷한 법칙이 있다. 거래가 발생하여 어떤 한 항목에 변화가 발생하면 다른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항목에도 동일한 금액의 반대변화가 발생된다. ‘자산=지분’이라는 회계등식에서 하나의 거래는 자산․부채․자본을 구성하고 있는 둘 이상의 계정과목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계정기입시에는 그 계정이 자산․부채․자본․수익․비용의 어디에 속하는가에 따라 차변기입인가 대변기입인가가 결정되며, 어느 계정의 차변에 기입되는 금액은 타계정의 대변에도 반드시 기입된다.

즉, 모든 거래는 둘 이상의 거래요소로 성립되며 차변의 거래요소(자산의 증가, 부채의 감소, 자본의 감소, 비용의 발생)와 대변의 거래요소(자산의 감소, 부채의 증가, 자본의 증가, 수익의 발생)의 결합관계(거래의 8요소) 중 어느 것인가에 속한다. 그리고 거래는 반드시 차변․대변 양쪽에 같은 금액으로 기입되는데, 이를 거래의 이중성이라 한다.

이 영화에서 흑인과 백인을 묶어놓은 쇠사슬은 양자간의 대립과 갈등이 아닌 이해와 사랑의 연결고리로써 역할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회계학의 차변과 대변은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흑과 백 사이에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 골을 아름답게 채색할 때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1963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의 첫 머리 “100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는 100년 전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한 링컨을 지칭한다. 그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꿈’이 있는 메시지로 이 글을 마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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