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서술형 시험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대사를 외우는 모든 과정이 힘에 벅찰 정도였다. 출연작만 40여 개에 다다르는 연기 베테랑이지만, 역대 출연작 중 비교불가로 대사가 많았단다. 법조문을 달달 외우고 고래에 대한 지식에 통달하며 7개월을 보냈다. 각고의 노력을 거친 끝에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에서 주인공 우영우를 연기한 배우 박은빈의 이야기다.
지난 22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씩씩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매 질문을 경청하고, 고민하다 신중히 답했다. 마주하는 눈빛엔 반짝임이 가득했다. 특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귓가에 시원히 꽂혔다. 작품에 대해 말하는 진중한 모습에선 프로다움이 느껴졌다. 작품을 잘 마쳐 뿌듯하겠다는 말을 건네자 “부침을 딛고 작품을 완성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출연 제안을 여러 번 고사했을 정도로 ‘우영우’는 그에게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대본을 보고 좋은 작품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잖아요. 작품마다 대본을 보면 이 캐릭터는 이렇게 뛰어놀겠다는 그림이 대강 보이는데, ‘우영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이야기에 영우라는 인물이 꼭 필요하다면 제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저를 믿어주신 감독님, 작가님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갖고 ‘우영우’에 뛰어들었죠.”
도전적인 역할엔 늘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우영우’는 달랐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망설임부터 앞섰다. 그런 박은빈을 움직이게 한 건 자기 효능감이다. 그에겐 뭔가를 도전하면 잘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고자 한 건 반드시 한다는 책임감 역시 컸다. 아역 배우 시절부터 줄곧 그랬단다. 박은빈은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해내겠다는 각오가 있었다”면서 “그런 결심들이 지금의 우영우를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폐인들의 응원도 그에겐 큰 힘이 됐다.
“자폐인과 함께 생활하는 관계자분으로부터 자폐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표현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제가 생각한 방향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바라며 연기했거든요. 옳은 길이라는 말을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저 또한 영우를 연기하며 많은 힘을 얻었어요. 오롯이 좌절하고 싶다는 영우의 말에서는 비장애인의 도움 없이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용기를 느꼈죠. 낯설고 두려운 상황도 스스로 이겨내려는 영우가 정말 멋있었어요.”
한계를 시험한 순간 역시 있었다. 대사가 특히 그랬다. 방대한 양을 소화하면서도 대사가 담고 있는 정보를 정확히, 속사포로 전달해야 했다. 발음이 좋은 배우로 손꼽히는 박은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판 장면은 같은 대사를 최소 30~40번 이상 소화하고, 법정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선까지 고려해야 했다. “한 장면만 여러 번 반복하면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지더라”고 말을 잇던 박은빈은 “배우로서, 인간으로서도 여러 한계를 시험해봤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자문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영우가 법과 고래 이야기를 하는 건 일상에서 억압된 에너지를 분출하는 치유법이다.’ 제겐 어려운 말들이 영우에겐 즐거운 거예요. 그런 감정을 살리려 했어요. 대사를 그저 읊는 것에 급급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뒀고요. 처음엔 많은 양을 외우는 게 벅찼어요. 나중엔 점점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끊어 읽는 호흡을 생각하며 매일같이 A4용지에 제가 해야 할 대사를 써내려갔어요. 매일 서술형 시험을 준비하고 답안을 채점하며 수험생처럼 7개월을 보냈어요. 끝내고 나니 ‘결국 내가 해냈다’는 감정이 올라왔죠. 속 시원한 성취감보다는 안도감과 고독감이 컸어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어요.”
박은빈은 자문 교수와의 상담과 서적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만 우영우를 표현했다. 연기를 위해 실제 자폐인을 따라하거나 도구로 여기는 걸 금기시했다. 그는 “배우로서 윤리적인 책임을 느꼈다”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의 진단 기준과 참고 서적을 공부하며 영우만의 고유성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박은빈에겐 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없었다. 돌아보면 매 작품이 그랬다. KBS2 ‘연모’에선 금기에 맞선 남장여자 왕을 연기했고 SBS ‘스토브리그’로는 야구단 최초·최연소 여성 팀장에 도전했다. 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늦깎이 음대생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연주법을 익혔다. SBS ‘이판사판’에선 육두문자를 일삼는 꼴통 판사를 맡아 기존에 없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박은빈은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캐릭터를 사랑했다”면서 “‘우영우’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특별하게 생각하진 않으려 한다”며 다부진 미소를 지었다.
“평소 저는 안정적인 성향을 추구하지만, 배우로선 늘 새로운 걸 시도하려 해요. 누군가가 실패라고 하는 순간도 제겐 교훈으로 남았거든요. 그렇게 한발씩 나아간 덕에 오늘날 ‘우영우’로 사랑받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영우처럼 씩씩하게 헤쳐 가려 해요. 시청자분들도 영우를 통해 용기를 얻으셨길 바라요. 극 중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대사를 참 좋아해요. 자폐인 외에도 이 세상엔 흰고래들과 섞여 살아가는 수많은 외뿔고래가 있잖아요. 자신만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외뿔고래에게 ‘우영우’를 바치고 싶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