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27)씨는 어린 시절 15분간의 심장정지로 뇌 손상을 입었다. 뇌 병변 장애가 생긴 그는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말하기도 힘들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 건 특수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정씨는 학교에서 개설한 무용 수업에 들어갔다. 단단하게 뭉친 근육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본인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도 즐거웠다. 정씨는 현재 장애인 무용단 빛소리친구들에서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춤을 추는 것은 좋지만, 춤을 추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은 여전히 많고 높다.
지난 1월12일 오전 9시.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집에서 정씨의 하루가 시작됐다. 잠에서 깬 정씨가 침대에 누워있자 그의 어머니인 강정임(58·여)씨가 다가와 신발을 신겨준다. 시간이 지나면 신발도 신기 어려울 정도로 근육이 굳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기립형 휠체어에 탄다. 기립형 휠체어는 정씨처럼 혼자 서 있기 어려운 장애인들을 돕는 기구다.
세수하기 위해 이동한 곳은 주방 싱크대 앞.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화장실을 개조했지만, 여전히 폭이 좁아 불편하다. 세수, 머리 감기, 양치 모두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이동용 휠체어로 갈아탄 정씨가 아침 식사를 한다. 손과 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의 아침 식사는 늘 간단하게 마시는 유동식이다. 바쁘게 아침 식사를 끝낸 정씨.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1시간 후 10km 떨어진 연습실에서 무용 연습이 있기 때문이다. 연습이 끝나면 근처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외부 공연이 없는 평상시 정씨의 일정이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정준호(55) 활동지원사가 차량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다. 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의 신체활동, 가사 활동, 이동 보조 등을 돕는다. 보건복지부에서 활동지원사의 급여를 지원, 장애인이 경제 부담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정씨는 활동지원사가 설치해둔 경사로를 통해 차량에 탄다. 활동지원사는 정씨의 휠체어를 차량에 고정하고, 경사로를 수납한다. 정씨가 차에 오르는 짧은 과정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계속 필요했다.
연습실로 가는 길. 활동지원사는 장애인들이 겪는 이동 불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장애인 콜택시는 대기자가 많기 때문에 몇백 명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저상버스는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출퇴근 시간대 이동 제약은 장애인의 학업과 근로를 제약하는 악순환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연습실에 도착한 정씨.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무용용 휠체어로 갈아탔다. 무용할 때만큼은 휠체어가 정씨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휠체어 회전으로 독특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무대에 오른 후의 이야기다. 외부 공연장에는 휠체어를 위한 시설이 무대에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경사로가 없는 공연장에 갈 땐 1m가 넘는 크기의 휴대형 경사로를 가지고 다닌다.
관객의 입장으로 공연장에 갈 때도 불편함은 여전하다. 장애인 지정석은 맨 앞줄이나 맨 뒷줄에만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력이 나빠서 멀리서는 사물이 잘 안 보이는 정씨도 불편을 감수하고 뒷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다. 맨 앞자리는 무대를 올려다봐야 해서 목에 무리가 온다.
연습을 마친 정씨가 새해 선물을 받기 위해 옆 건물에 있는 빛소리친구들 사무실로 이동했다. 건물 입구엔 자동문이 없다. 게다가 폭이 좁고 경사가 높아 정씨 혼자 출입하기 어렵다. 결국 동료 무용수의 도움으로 건물에 들어갔다. 이번엔 엘리베이터가 문제였다. 정씨가 팔을 뻗어도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이 닿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인 재활치료센터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1.3km 떨어진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역 인근에 있다.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출입구는 3번이지만, 엘리베이터는 길 건너편 2, 8번 출입구 인근에만 설치되어 있다. 정씨는 눈앞의 출입구를 두고 길을 건넜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면 최소 3~4번 엘리베이터를 탄다. 문제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바쁜 비장애인들 차지였다. 정씨의 어머니 강씨는 “장애인들은 자존감이 떨어져 다른 사람에게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같은 상황이 누적되면서 이동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말했다.
도착지인 망원역에는 승강장과 엘리베이터 사이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다. 폭이 좁은 통로에 급커브가 많은 ‘S자 코스’였다. 통로 벽에 부딪히지 않게 조작하는 게 힘겨웠는지 휠체어를 조작하는 정씨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가 언제까지 아들만 보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겪는 어려움도 언젠가는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기에 연습이 필요해요” 경사로를 오르는 정씨를 보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자립을 위한 연습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아들을 보는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정씨가 경사로 끝에 다다랐다. 같은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다 떠난 후였다. 승강장은 텅 비어있었다.
변준언 쿠키청년기자 byunjuneon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