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락자 없는 생존 예능은 가능할까. 영화 전문 유튜버 이승국(예명 ‘천재이승국’)은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파고든다. 웨이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사상검증구역)에서다. 닉네임 ‘테드’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승국은 탈락자를 최소화하는 필승법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고안한 필승법이 구성원 전체의 자율성을 침해할까도 걱정했다. 모두와 친하되 어느 세력에도 포섭되지 않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도 “전체주의 방식이라 조심스럽다”고 단서를 다는 그에게 시청자가 붙여준 별명은 ‘평화주의자’.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는 이승국을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동 한 회의실에서 만났다.
Q. 처음엔 출연을 망설였다고 들었다. 왜 마음을 바꿨나.
“미팅 당시 제작진이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논리를 구성하는지 보시려는 것 같았다. 그때 나와 다른 답변을 하는 사람이 있겠다, 혹은 비슷한 논리를 다른 톤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제작진이라면 출연자를 왜곡해서 보여주진 않겠다는 믿음도 있었다.”
‘사상검증구역’ 출연자는 정치·젠더·계급·개방성 4개 항목에서 각 1~3점으로 구분된 점수를 ‘사상 코드’로 부여받는다. 합숙 기간 열흘 중 일주일간은 다른 출연자의 사상 코드를 알아맞혀 상대를 탈락시킬 수 있었다. 출연자 중 1명은 공동체에 갈등을 조장하는 불순분자였다. 닉네임 ‘벤자민’으로 출연한 변호사 겸 사업가 임현서가 이 역할을 맡았다.
Q. 사상코드를 부여받은 채로 타인을 만나 관계 맺는 경험은 어땠나.
“나를 얼마나 보여주고 감출지 고민하며 촬영장에 갔다. ‘트롤링’(분탕)하는 사람이나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어떻게 논리로 압도할지 혹은 어떻게 숨을지 생각하며 긴장도 했다. 그런데 막상 출연자들이 모이니, 우리가 사회에서처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 있더라. 적개심을 갖고 상대를 부수러 온 게 아니라 적당한 긴장감과 따스함으로 관계를 맺었다. 상대의 사상 코드를 몰랐기에 오히려 서로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 면도 있었다. 출연자들끼리 나누는 대화와 미션을 통해 서로를 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Q. 누군가 나를 탈락시킬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불순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열흘여를 보냈다. 두려움에 압도되지는 않았나.
“누구에게나 내가 되고 싶은 좋은 사람의 모습이 있지 않나. 나 또한 그 모습에 가까워지길 바라며 나를 깎아나가며 지금껏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닦아놓은 나의 기반이 서바이벌 환경에서 깨질지 혹은 지켜질지 알고 싶었다. 궁극의 목표는 ‘이상향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긴 했다.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하려 했다는 점에선 ‘사상검증구역’ 속 나와 평소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일상의 이승국도 본능적인 면과 싸우고 타협도 한다.”
Q. ‘불순분자를 제거하면 내 기분이 좋아진다’는 발언은 의외였다.
“나도 그 말을 한 나 자신에게 놀랐다. 맥락은 있었다. 당시 벤자민에 대한 구성원들의 불신이 컸다. 벤자민이 직전에 감정적인 발언을 해 모두 당황하기도 했다. 상황을 정리하려면 나도 세게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발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본다. 결국 입장 차이다. 불순분자는 활동을 최소화했다고 하나 그것은 공동체가 아닌 자신을 위한 길이었다. 구성원들로서는 불순분자에 대한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의 존재로 인해 서로 의심하느라 불쾌하고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나 역시 ‘배신자는 처벌하겠다’는 리더 후보 공약에 반발하면서도 서로를 감시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데 따른 무거운 마음과 무력감이 있었다.”
Q. 불순분자를 탈락시킨 결정은 어떻게 자평하나.
“벤자민을 떨어뜨리기로 한 이유가 세 가지 정도 있다. 우선 벤자민에 대한 신뢰도가 0에 가까워서 무슨 말을 해도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두 번째로는 벤자민이 미지의 인물이었다는 거다. 벤자민을 탈락시키지 않는다면, 그를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다른 구성원이 불순분자로 상대하기에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벤자민이 끝까지 강성으로 나오다 보니 그를 살리자는 제안이 나오기 어렵기도 했다.”
이승국은 최종 단계를 목전에 두고 탈락했다. 다른 출연자들에게 받은 호감도 수로 탈락자를 겨루는 게임에서다. 출연자들은 돈을 주고 호감도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국은 탈락 위기에 놓이고도 그러지 않았다. 다른 탈락 후보의 호감도 개수를 자신이 알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대의 사정을) 아는 건 승부가 아니다. 그건 학살”이라고 그는 말했다.
Q. 마지막 선택에 후회는 없나.
“후회가 있든 없든 (그때로 되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면 무엇을 보게 됐을지 궁금했다. 물론 자금을 썼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방송을 본 친구들은 ‘너답다’고 했다.”
Q. ‘사상검증구역’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
“영화 ‘더 레슬러’(감독 대런 아로노브스키)를 좋아한다. ‘나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저 캐릭터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는 알겠어’를 느끼게 해줘서다. 결국 나는 ‘내가 동의할 수 없으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그린 작품을 좋아한다. ‘사상검증구역’은 이것이 현실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줬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대부분 욕설로 되어있는 짧은 텍스트로 접하는 그 사람 중에 진짜 괴물은 많지 않겠다고 느꼈다. 저 사람이 괴물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나와 다를 뿐이며 다름은 죄가 아니다. 그에겐 최소 20년간 축적된 경험과 환경, 철학과 윤리가 있다. 그 모든 걸 말 한마디로 파악하려는 건 오만이다. 이론적으로만 알던 것을 ‘사상검증구역’이 체감할 수 있게 해줬다.”
Q. 앞서 말했던 ‘내가 되고 싶은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 반대로 내가 받은 좋은 기운을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람. 내가 살아온 인생을 토대로 정리하자면 그렇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고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 다만 그 좌절들이 나를 단련시키기도 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경험도 하게 해줬다. 이해할 수 있는 폭도 넓어진 것 같다. 내가 다 안다거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속단하지 않고, 열심히 고민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