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人터뷰] 김영애 “진정한 슬픔은 담담함의 옷을 입더라”

[쿠키人터뷰] 김영애 “진정한 슬픔은 담담함의 옷을 입더라”

기사승인 2009-09-16 11:23:00

"‘애자’는 진흙탕 속 나를 건져준 작품

[쿠키 연예] ‘어머, 내 딸 강희가 핸드폰 빌려서 문자 보냈네. 나도 이모티콘 답문 해줘야 하는데…’.

배우 김영애(58)는 인터뷰 시작 전 영화 ‘애자’에서 딸 애자로 출연한 여배우 최강희로부터 문자 받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최강희는 휴대전화가 없고 무선 호출기를 사용하는데, 김영애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휴대전화를 빌린 것이다. “제가 기계 다루는 게 좀 서툴러요. 그나마 문자 보내는 것은 곧잘 하죠, 호호.”

말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였다.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는 ‘이순’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나이었지만 그의 인생 시계는 거꾸로 가는 듯 했다.

황토제품업체 ‘참토원’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연기자의 길을 잠시 쉰 김영애. KBS 드라마 ‘황진이’에 출연한 이후 3년 가까이 공백이 지속되자 ‘사업가로 완전히 전향하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던 중 2007년 KBS2 TV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에서 제기한 황토팩 중금속 논란에 휘말리면서 사업 위기를 맞았고, 이 때 다섯 살 연하의 남편과도 5년간의 재혼 생활을 청산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는 김영애. 그의 배우 수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연락 안 와서 캐스팅 무산된 줄 알았어요

영화 ‘애자’는 비오는 날에는 소주를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소설가 지망생 애자(최강희)와 한 번 계획한 것은 이루고 마는 고집스러운 수의사 영희(김영애)의 애틋한 모녀 이야기다.

비수와 같은 말로 서로의 마음을 할퀴지만,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평범한 모습이다. 모녀의 사랑이야기는 다소 식상한 소재이지만, 정기훈 감독의 섬세한 시나리오와 탁월한 영상미에 의해 아름답게 살아났다. 여기에 김영애와 최강희의 명품 연기가 양념을 더해 맛깔 나는 작품이 됐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김영애에게도 ‘애자’는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다가왔단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막혔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진흙탕에 빠져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애자’가 저에게 산소가 되어줬죠. 이 작품을 통해 배우 김영애로 돌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아마 ‘애자’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을 거예요.”

운명처럼 다가온 ‘애자’. 그런데 촬영 직전 출연이 무산될 뻔했다. 내막은 이랬다. 영화사로부터 시나리오를 건네받은 김영애는 읽자마자 출연을 결심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영화사로부터 캐스팅 전화가 걸려오지 않은 것이다. 김영애는 ‘다른 배우가 캐스팅 됐나보다’ 생각하면서 굉장히 아쉬워했다. 알고 보니 영화사에서는 김영애의 확답 전화가 없어 ‘우리 작품이 마음에 안 드시나보다’ 하며 ‘다른 배우를 물색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한 발짝 늦었더라면 우리는 ‘애자’ 속 영희로 분한 김영애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출연작 100편 이상…‘애자’ 속 영희는 색다른 엄마 캐릭터

‘애자’는 모녀의 이야기이지만 남자 관객들의 마음도 울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모성애에 감동을 받는 관객은 남녀 구분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천방지축 애자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았죠. 현재 삶에서 한 발 발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뭉클한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애자’를 관람하면서 자신이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지 위치를 확인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로 다가올 겁니다.”

그동안 김영애는 숱한 작품에서 다양한 어머니 상을 연기했다. KBS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는 겉으로 유약해보이나 가족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혈 엄마로 등장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는 가녀린 듯 강인함을 품고 있는 태수(최민수) 어머니로서 인상 을 남겼다. ‘애자’ 속 영희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아픔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우리네 어머니다. 평범한 것이 강력한 무기라고 했던가. 김영애는 최대한 힘을 빼 ‘평범한 영희’이자 ‘푸근한 엄마’ 이미지를 보여주며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을 얼추 헤아려보니 100편이 넘더라고요. 스물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왔죠. 제 아무리 배우이지만 모든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네요. 그런데 ‘애자’는 제 연기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품이에요. 그동안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과 달리 멋도 화려함도 없지만 가식 없는 캐릭터라 마음에 들거든요. 우리 어머니의 평범한 이야기를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애자’ 촬영하면서 어머니 생각 간절했다”

화제가 ‘어머니’에게로 옮겨가자 김영애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모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모친은 여느 부모가 그렇듯 속내를 표현하는데 서툴렀지만 자식을 끔찍이 아끼던 분이셨단다. 기자는 그의 모친이 ‘애자’ 속 영희와 흡사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촬영하면서 영희와 교차되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입장에서 영희와 애자의 캐릭터를 온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께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어느 날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평소 자주 가던 병원인데도 어떻게 가야할 지 몰랐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느낌이었어요. ‘애자’에서도 쓰러진 영희를 안고 울부짖는 애자와 딸 품에 안긴 영희의 마음이 어땠을지 느껴지더라고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이야기도 덧붙였다. 슬픔이 깊을수록 담담함의 껍질을 입게 되는 삶의 비밀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배우답게 김영애는 선친과의 이별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의 자세랄까, 방법을 득했다. 테크닉을 배제한, 그래서 더욱 가슴을 울리는 ‘애자’ 속 순수 연기의 근원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제가 연기자로 갓 데뷔하던 때에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멍하니 앉아있었죠. 한참 후 제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의사에게 매달리면서 격하게 따질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 때 깨달은 게 진정한 슬픔은 담담함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거였어요. 보는 이들의 심금을 잔잔하게 울릴 수 있는 것은 꾸밈없는 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난 엄마로서 낙제점”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엄마 김영애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장성한 아들 하나를 둔 김영애는 ‘엄마’로서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제 일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엄마였어요. 아들과 가정보다는 일에만 매달렸죠. 제 성격상 ‘적당히’ ‘대충’이라는 것을 하지 못 하거든요. 엄마로서 낙제점이었기에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아들에게 헌신하면서 살고 싶어요.”

김영애는 자신에 대해 “칭찬에 인색하고 꾸중이 심했던 엄마”라고 고백했다. “아들과 친구처럼 살갑게 지내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며 지난날을 후회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자라준 아들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무엇보다 심정이 곱고 따뜻한 아이로 자라줘서 감사해요. 좋은 며느리까지 데려와 더 바랄 게 없죠. 살면서 아들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첫 번째 이혼 얘기를 꺼낸 거예요. 교문 앞에 힘없이 서 있던 아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어린 아이에게 정말 잔인한 짓을 한 것 같아요.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달려왔는데 행복한 가정을 지켜내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원망도 컸고요.”

그는 아들 내외의 응원 덕분에 연기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이 연기하는 제 모습을 가장 좋아해요. 젊은 시절 아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 했지만 ‘연기자 김영애’로서 부지런히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아들에게 기쁨이 되고 싶어요.”

“‘애자’로 칭찬받고 싶어요”

거친 모래 폭풍을 지나 다시 일어선 김영애. 그는 ‘애자’를 통해 한층 성숙해진 것 같다고 털어놨다. “예전에는 제가 뜻한 방향으로 삶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제 인생을 개척하고 싶어요. 세상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영희처럼 저도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밝힌 그의 바람은 다소 의외였다.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다양한 연기 색깔로 국민을 울린 배우답지 않은 소박함이었다. 이미 그 칭찬은 넘치도록 받고 있다. 영화에 대한 호오를 떠나 평단과 관객이 영희와 애자, 두 모녀의 연기에 입을 모아 호평하고 있다.

“다시는 연기할 줄 몰랐는데 돌아오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꾸준히 작품하면서 ‘배우 김영애’의 발전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애자’를 통해서 ‘김영애 연기 잘한다’는 칭찬도 듣고 싶고요. ‘배우 김영애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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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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