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40대를 지칭해 불혹(不惑)의 세대라고 한다. 공자의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나이 40세를 넘어서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됐다(四十而不惑)”는 표현에서 유래된 말이다.
새해 들어서 이 불혹이라는 단어가 부쩍 자주 머릿속에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40대의 절반을 넘기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인생관으로 무장했는지를 점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절래절래 저어진다. 생각이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도무지 아니라는 결론이다. 공자는 당시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다. 무시로 다가오는 세상살이의 여러 압박으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자의 말이 참으로 무색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리곤 이는 나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40대 치고 자신에 대해 불혹의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으로 여겨진다. 간혹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이가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40대는 누구인가. 굳이 연도로 따지면 1968년생부터 1977년까지인 이들은 가정에서는 물론 사회에서도 중추적인 허리 역할을 맡고 있다. 대부분 가정에서 학부모이면서 직장에서 핵심 중간 관리자급에 해당한다. 연령대별로 따져도 베이비붐 세대보다 50여만 명이 더 많을 정도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그럼에도 이 40대가 우리 사회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6·25세대,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모래시계세대, 386세대 등 시대상황별로 특징적인 이름이 있음에도 이들은 마땅한 타이틀조차 얻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잊힌’이란 의미의 영어단어 ‘Forgotten’의 첫 글자를 따 ‘F세대’로까지 불릴까.
지금의 40대는 민주화 운동의 막차를 탄 세대이자 세계화의 혜택을 본 세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 시대가 종식돼 이념 전쟁에서 해방된 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마음대로 배낭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세대이다.
이들 세대가 학업을 마치고 취업할 무렵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고 ‘정보기술(IT) 버블’을 겪었다. 40대 초반의 경우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IT를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물결에 동참하던 시기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40대 후반은 사회생활 초창기에 역사적인 전환점을 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앞선 베이비붐 세대가 1980년대 후반 이른바 ‘3저(低)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지금 40대는 오늘날의 취업 시장,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어느 세대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1년여 전 한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닌 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내용인 이 드라마는 한풀이라도 해주듯 하며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어쨌든 지금의 40대는 앞선 세대로부터 전쟁과 보릿고개,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등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에 이뤄진 갖가지 이야기와 무용담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행복한 세대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그렇다고 직접 겪은 내용을 전하며 다음 세대에게 “너희들은 행복해”라고 할 입장도 못 된다. 그저 그렇게 살아온 셈이다.
많은 이들이 어느 순간 문득 눈을 떠보니 나이 40줄을 들어섰고 금세 40대 중반을 내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그렇다고 앞날이 환하게 밝아 보이지도 않다고 한다. 아직도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은데 점점 기력이 부친다고도 한다. 그래도 어쩌랴. 힘을 내는 수밖에.
작가 이의수가 쓴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라는 책 내용이 많은 공감을 준다. 한 구절만 봐도 알 수 있다. “마흔이 되면 세상을 좀 알게 되고, 사람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꿰뚫어보게 되고, 희로애락을 알게 되지만, 막상 야전에 뛰어들면 세상살이를 안다는 자부심은 맥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마흔이란 나이는 위태롭고 슬프며 외롭기 그지없다.”
고정희 시인은 ‘40세’라는 시에서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는 40대를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시기”라고 표현했다.
이 땅의 40대여, 힘을 내자. 누가 뭐래도 우리는 가정과 사회의 중추다. 앞으로도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일들을 맞닥뜨리겠지만 거뜬히 극복해 나가자. 20~30대의 재기발랄함과 50~60대의 권위 사이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찾자. ‘사오정(45세 정년)’, ‘삼팔선(38세 은퇴)’이란 말들이 나돌아도 쓴웃음 한번 짓고 앞으로 나가자. 어차피 성인도 아닌데 인생살이가 불혹(不惑)이 아니면 어떤가. 작고 소박한 꿈이라도 꼭 부여잡고 희망을 노래하자. 우리가 살아나야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