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울진=김희정 기자] 차를 따르는 손이 투박하다.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시고 또 차를 우리는 동안 신동수 도예가의 이야기도 차를 따라 흐른다.
찻사발, 다관, 찻잔, 달항아리. 또 그 모든 것의 근본인 흙에 대한 이야기와 흙이 불을 만나 도자기로 완성되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완성된 작품의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 속에서 차처럼 은근하게 우러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찻잔에 담는 이야기
경북 울진에서 울진의 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토원요(토원도예)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작품 전시 공간이자 차를 마시는 방에 마주 앉았다.
그는 익숙해진 손길로 차를 우리고 차를 따른다. 차를 마시는 사이 다관에 새 물을 받아 차를 우린다. 차를 마시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찻잔을 얇게 만든 이유는 찻잔에 담긴 차의 따듯함이 찻잔을 쥔 손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전달된 온기는 차의 향과 함께 마음에 닿아 마음을 온화하게 하지요.”
찻잔이 가볍다. 입술에 닿는 부분도 버들잎처럼 얇다. 1350도의 열기 속에서 흙이 녹고 굳어져 만들어진 경질의 찻잔이지만 입술에 닿는 느낌은 흙의 그것처럼 부드럽다.
“이 찻잔에는 울진의 사질토가 많이 함유됐습니다. 찻잔을 만들 때 쓴 유약에도 울진의 장석이 들어갔습니다.”
그 찻잔에 담긴 차도 부드럽다.
그는 찻잔과 찻사발. 다관 등 차를 마시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그릇에 담기는 차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차를 우리고 마시는 도구가 형식이라면 그 도구에 담기는 차는 내용이다.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릴 때 ‘차문화’는 상생하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찻잔에서 흙으로 이어진다.
“도자기의 원재료인 흙에 따라 작품에 드러나는 느낌이 달라지는 거죠. 저는 울진의 흙을 사용합니다. 유약을 만드는 재료도 마찬가지구요. 100% 울진 흙으로 작품을 만들 때도 있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흙과 울진의 흙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작품 구상 단계에서 작품에 어울리는 흙에 대해서 먼저 생각합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기고, 작가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근본은 도자기를 만드는 원재료인 흙입니다.”
◆ 토원(土源), 흙의 근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호가 토원(土源)이다. 흙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울진의 유서 깊은 사찰인 불영사의 주지스님이 지어줬다고 한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토지감정평가 자격증 공부를 하게 되면서 흙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다. 흙의 종류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경기도 여주를 찾게 됐고 그곳에서 도자기를 만났다. 그리고는 토지평가사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여주에 있는 봉운요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도자기를 배우게 됐다. 그때 그의 나이가 20대 후반이었다.
늦게 들어선 도자기의 길인만큼 그는 가르치는 그대로 배웠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물레, 가마 등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배우려는 그의 마음을 울린 스승들의 한 마디가 있었다.
“흙을 먼저 배워라.”
그렇게 3년 정도 여주에서 도자기를 배우는 동안 우연한 기회에 문경의 찻사발을 접하게 됐고 문경을 찾아갔다. 그때 문경 진안요 고(故) 송산 서선길 선생과 인연이 닿았다.
여주 다음에는 이천이었다. 이천 일월요 우승보 선생도 흙을 강조했다. 작가 자신만의 흙과 유약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선길 선생도 같은 가르침을 줬다.
“그분들은 모두 자신의 흙과 유약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셨지요. 작품의 용도에 맞는 흙을 사용해야 작가가 의도하는 작품이 나옵니다. 1300도가 넘는 열기를 가마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흙이 필요하면 그 흙을 찾아 써야 하는 거죠.”
이야기는 다시 차를 우리는 다관과 찻잔, 찻사발로 돌아왔다.
“지금 차를 우리고 있는 이 다관을 만들 때 온기를 조금 더 오래 보듬을 수 있도록 보통 흙보다 입자가 굵은 흙을 일부러 넣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 된 것은 아닌데 제가 여태껏 해보니 그렇게 되는 거였습니다.
“찻잔도 마찬가지예요. 보기에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찻물을 담아 놓았을 때, 그리고 그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실 때 느껴지는 맛과 분위기가 차를 마시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게 좋은 찻잔 아니겠습니까.”
그는 도자기를 완성하는 ‘불’에 대해, 그리고 불의 집이자 불기운을 흐르게 하는 ‘가마’에 대해서도 배우고 익혔다.
“스승님들은 ‘흙을 이겨라’, ‘불을 이겨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태껏 도자기를 만들다 보니 그 말에 담긴 뜻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겨라’라는 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넘어 자신의 몸처럼 자유롭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또 ‘제압’하는 게 아니라 ‘동화’된다는 의미도 있고요.”
흙을 녹여 흙 자체의 빛깔을 드러나게 하는 게 불의 힘이다. 그 불을 살리는 집이 가마다. 가마는 불길을 살리고 불의 기운이 자유롭게 퍼져나가 도자기에 고스란히 스미게 하는 생(生)의 동굴이다. 생명을 잉태한 자궁과 같다.
“송산 서선길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울진을 찾아와 가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선생님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가마를 만들었죠.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저 혼자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불기운으로 완성된 그의 작품에서 흐르는 물 같은 자유가 느껴진다. ‘찻사발은 우주 같이 깊어야 한다’는 말을 새기고 있는 그가 빚은 찻사발을 가만히 바라봤다.
달항아리의 선이 찻사발에서도 보였다. 찻물 담긴 찻잔의 굴곡이 물길처럼 보이다가 하늘에 뜬 달의 테두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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