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준범 기자] 지난 8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장산범’ 언론시사회에서 한 기자가 질문 도중 “박혁권 배우의 역할에 반전이 있을 것 같았는데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박혁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이크를 들고 “반전이 없는 게 반전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며 “역할에 반전이 없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 짧은 문답은 배우 박혁권에게 대중이 기대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박혁권이 어떤 방식으로 배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중은 그가 맡은 역할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박혁권은 그 믿음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마음마저 이해하는 태도를 유지한다.지난 10일 서울 팔판로 한 카페에서 만난 박혁권은 평온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차분하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나갔다. 진지한 얼굴로 예상 밖의 대답을 던져 여러 번 웃음을 자아냈다.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영화가 나올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공포 영화는 다른 장르와 달리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 장르 같아요. 보통 감정 위주의 영화는 사랑이나 슬픔 같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한데, 공포 영화는 제가 표현한 것 위에 무언가를 더해줘야 하거든요. 소리가 어떻게 들어가고, CG가 어떻게 입혀지고 표정이 어떻게 나올지는 제가 참여하지 못하니까 불안했어요. 또 전체적인 완성도 부족하거나 한쪽 부분이 과해서 영화가 불편해지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다행히 영화가 만족스럽게 나왔어요. 홍보하기 창피한 영화가 나올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싶었죠.”
‘장산범’에서 박혁권은 이야기 전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연기에 주력했다. 함께 출연하는 염정아와 신린아가 그 위에서 마음껏 연기력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이었다. 촬영 기간이 겹쳤던 SBS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 역할과 달리 중심 잡는 역할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단다. 또 디테일한 연기의 뉘앙스를 표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보여줄 게 많지 않고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역할도 아니에요. 하지만 대본의 작은 뉘앙스를 어떻게 잘 어떻게 표현할지도 욕심나는 부분이었어요. 예를 들어 산에서 데려온 여자애가 저한테 ‘아빠, 안녕. 잘 자’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때 표정만으로 ‘왜 내가 니 아빠야’라는 걸 잘 표현하면 꽤 고급연기 같이 보일 것 같았어요. 만약 아침드라마였으면 직접 말로 했을 연기죠. 반대로 영화 설정에 따라 눈이 멀어서 안 보이는 연기를 했는데 그건 1단계 연기예요. 디테일한 감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기본적인 것이라서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현장에서 모니터할 때 우연히 시선이 맞아 떨어져 그 쪽을 보는 것 같으면 다시 찍기도 했어요.”
박혁권은 자신의 기준에 맞는 연기를 할 때 가장 성취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의 트렌드를 신경 쓰고 따라가기보다 솔직한 감정 표현에 집중하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최근 연기적인 고민이 생겨 당분간 쉬는 기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털어놨다.
“익숙해지는 게 가장 고민이에요. 매너리즘에 빠지는 건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잖아요. 저도 그렇게 될까봐 무서워요. 제 연기의 기준점은 ‘사람 같냐’는 것 하나예요. 실제로 사람이 저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까를 생각해요. 수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장산범’ 일정이 끝나면 배우로서 활동을 자제하는 셀프 안식년을 가지려고 해요. 다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좀 가져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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