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그리즐리는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작사, 작곡부터 노래에 랩까지 모두 소화한다. 어느 순간부터 프로듀싱도 직접 하기 시작했고, 뮤직비디오의 콘셉트와 기획까지 손을 대며 영역을 넓혔다. 그의 색깔이 곡 하나하나에 잔뜩 묻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업 방식도 독특하다. 비트나 멜로디보다 가사를 먼저 쓰는 식이다.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세련된 사운드로 대중에게 잘 전달할지 늘 고민한다. 19일 발매된 싱글 앨범 ‘디퍼런스’(Difference)도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최근 쿠키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그리즐리는 이번 싱글의 영감을 영화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신곡 ‘투모로우’(Tomorrow)와 ‘달라’는 영화 ‘노트북’과 ‘미드나잇 인 파리’를 연이어 보고 쓴 곡이에요. ‘노트북’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미쳐서 사랑하는 모습을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들에게 대입시켰어요. 그렇게 보니 원래 다른 삶을 사는, 잘 안 맞는 커플이더라고요. 커플의 사랑하는 과정과 이별하는 과정을 두 곡의 연결된 스토리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평소에도 영화를 보고 가사를 써두는 편이에요. 가사를 휴대전화 메모장에 몇 십줄 정도로 길게 적어놓고 조합을 한 다음 멜로디를 만들고 편곡하는 방식으로 작업하죠. 비트에 맞춰서 작업하는 건 제 마음대로 잘 안 나와서 불편하더라고요.”
그리즐리의 독특한 점은 또 있다. 사랑에 관한 노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리즐리는 달콤한 사랑 노래를 하면서 괴리감을 많이 느꼈다고 털어놨다. 대신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제 노래 중에 ‘그래서 그랬지’라는 곡 이후로 사랑 노래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렇게 달달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노래를 하고 있자니 괴리감이 들었거든요. 제가 항상 메모하는 이야기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사랑에 관한 건 아니었어요.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오래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검정치마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너무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리즐리의 음악은 조금씩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불면증’은 음원차트 14위까지 올랐고, ‘미생’은 20대 여성이 가장 많이 들은 음악 10위권에 진입했다. 대대적인 홍보 없이 음악의 힘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대중들의 호응은 음악인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지난 5월 선공개된 청하의 싱글 ‘월화수목금토일’을 만들었고, 이승환의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도 올랐다. 그리즐리는 청하와 이승환의 태도에 놀랐다고 털어놨다.
“‘월화수목금토일’은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만든 곡이에요. 함께 만든 프로듀싱팀 크래커 형들과 음악적 가치관이 정말 잘 맞거든요. 청하씨도 잘 따라 와줬어요. 프로는 프로더라고요. 녹음을 10시간 정도 했는데 끝까지 밝은 모습이었어요. 작사가 명단에 청하씨 이름을 넣으려고 했는데 괜찮다고 거절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청하씨의 이야기도 가사에 넣고 같이 수정하면서 만들었는데 참여한 것도 별로 없어서 싫다고 하더라고요. 이승환 선배님은 진짜 멋있었어요. 공연을 몇 천, 몇 만 번은 하셨을 텐데도 공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세요. 목을 아끼려고 말씀도 많이 안 하시고 밴드 스타일링도 직접 다 하시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그리즐리는 정규 1집 앨범 ‘i(아이)’에 대해 앞으로 다시 할 수 없는 필살기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앨범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정규 앨범은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스스로 달라진 점도 많다.
“첫 정규 앨범이 저의 가장 솔직한 얘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아마 그 앨범 같은 솔직한 얘기는 다시 안 나올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 담았거든요. 앨범을 내고 달라진 점도 많아요. 예전에는 제 음악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제 진솔한 얘기를 다 담은 앨범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니까 누구에게나 들려주고 싶은 거예요. 누구를 만나도 떳떳하고 똑같은 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달라진 것 같아요. 제가 만든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더 진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앞으로도 제가 살아온 모습 중에서 거짓되고 꾸며낸 이야기 말고 진짜 느낀 것들로만 음악에 담고 싶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