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엄지원은 영화 ‘기묘한 가족’을 준비하면서 전국의 가발집을 수소문했다. 시골 아낙 남주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가발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고 어떤 건 너무 빤했다. 분장팀에게 수도 없이 ‘이건 아닌 것 같아’라며 퇴짜를 놓은 끝에, 마음에 쏙 드는 가발을 찾을 수 있었다. 머리 길이와 잘린 모양, 머리카락이 빠글거리는 정도까지 일일이 공을 들인 덕분이었다.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지원은 “새롭지만 너무 튀지 않는, 익숙하되 낯선 느낌을 찾는 게 어려웠다”며 웃었다.
‘기묘한 가족’은 충청도 시골 마을에 준걸(정재영)의 가족이 좀비를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엄지원이 연기한 남주는 준걸의 아내로, 생활력이 강하고 ‘깡’도 세다. 좀비에게 물린 시아버지(박인환)의 얼굴에 프라이팬을 날릴 정도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엄지원은 영화를 위해 꽃무늬 조끼를 입고 뽀글거리는 가발을 썼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검게 화장했다. 화면에선 도드라지지 않지만 얼굴에 갈색 기미도 그려 넣었다.
엄지원은 “엄지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했다. 시니컬하고 쿨한 남주의 성격을 살리려고 목소리 톤도 낮게 잡았다. 코미디 영화인데도 작정하고 웃기려 들지 않았다. 상황이 우스꽝스러워도 인물의 반응은 리얼하길 바라서다. 그가 “(연기에) 신경을 덜 쓰려고 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연기는 배우의 언어다. 엄지원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가’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라고 했다. ‘기묘한 가족’에 출연할 땐 “장르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화 ‘소원’ ‘미씽: 사라진 여자’ 등 감정 소모가 큰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 터라, 무뚝뚝한 남주에게 매력을 느꼈다고도 했다. 요즘엔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MBC ‘봄이 오나 봄’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흥행에 대한 부담은 있죠. 그게 배우를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흥행이 잘 안 될 땐 ‘내가 배우로서 부족한가’라는 걱정도 들고요.”
엄지원은 스스로를 “굉장한 흥행작이나 대작에 출연한 적이 없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기회도 많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엄지원 개인의 문제이랴. 한국 영화의 남초 현상이나 장르의 쏠림 현상은 지난 몇 년 간 영화계의 화두였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납작했다. 엄지원은 “소모적이거나 기능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자신했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에서 그는 끈질기게 생존하는 여성이었고,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선 속을 알 수 없는 교장이 됐다.
“성별을 나누는 게 큰 의미는 없다고 봐요. 배우로서 공감과 지지를 얻는 연기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죠. 다만 그걸 보여줄 장이 없다는 데 대한 목마름은 있었던 것 같아요. JTBC ‘스카이캐슬’이 아주 잘 됐기 때문에 (여성 주연 작품을 시도해보자는) 체감 온도는 높은 것 같아요. 그런 기회가 많아지면 조금 더 비슷하게 연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싶고요. 기회가 많아지는 만큼 연기를 잘 해내는 게 숙제죠.”
그는 연기를 “자아를 깨면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작품 안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듯, 자신도 연기를 하며 성장한다고 믿는다.
“전 욕심이 많거나 악바리 같은 성격이 못 되거든요. “경쟁에서 치이면 ‘여기서 살아남아야지!’가 아니라 ‘난 빠질래’ 하는 쪽이에요. 하지만 배우로서는 그 순간에 포기할 수 없잖아요. 어떤 면에선 초탈했지만 어떤 면에선 더 고군분투하죠. 여전히 배우며 변화하고 있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