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박양준 부장판사)는 22일 페이스북이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시정명령 등 처분 취소소송 선고’에서 페이스북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글로벌 콘텐츠사업자(CP)와 국내 기업 간 역차별을 막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2016년 말 SK브로드밴드 가입자들이 겪은 페이스북 접속 장애다. 당시 페이스북은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사와 망 사용료 협상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두 회사보다 우위를 얻기 위해 접속 경로를 사전고지 없이 미국·홍콩 등으로 변경했다.
페이스북 사용이 느려질 경우 이용자들의 민원은 페이스북이 아닌 국내 통신사에 쏠리기 마련이다. 이점을 협상카드로 이용하기 위해 고의적 접속경로 변경을 했다는 것이 정부와 국회, 통신사 판단이다. 실제 이 과정에서 페이스북 접속 응답속도는 SK브로드밴드의 경우 평균 4.5배, LG유플러스는 2.4배 느려졌다.
방통위는 “페이스북이 정당한 사유 없이 접속경로를 변경해 국내 이용자에게 피해를 발생시켰다”고 판단, 전기통신사업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부당한 이용자 이익 제한’으로 보고 페이스북에 과징금 3억9600만 원을 부과했다. 페이스북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 글로벌 CP에 패소한 방통위…‘기울어진 운동장’ 해소 어려워질 듯
이번 판결은 정부가 글로벌 콘텐츠사업자(CP)가 처음으로 법원에서 맞붙은 사례여서 국내뿐 아니라 여러 나라 규제 당국에서도 주목했다.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콘텐츠공급자(CP)들은 국내 뿐 아니라 각 국가에서 엄청난 양의 트래픽을 발생시키지만 이에 대한 망 이용료를 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네이버·카카오 같은 국내업체들은 높은 비용의 망 사용료를 정부에 지불하고 있어 글로벌 기업들의 ‘무임승차 논란’이 지속됐다.
방통위의 페이스북 징계는 국내 인터넷 업체들에겐 역차별 해소 규제 정책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방통위 관계자가 “승소한다면 그동안 해외 사업자 역차별 문제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돼,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원활히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이유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승리한 것은 방통위가 아닌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이 국내 접속경로를 임의로 바꿔 응답속도가 떨어지면서 이용자들이 큰 불편을 겪었지만, 고의성이 없으니 방통위의 과징금 부과가 위법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콘텐츠공급자(CP)가 접속경로를 변경해 접속경로 별 트래픽 양을 조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CP는 접속경로를 변경하지 않거나 변경할 때 미리 특정 인터넷서비스공급자(ISP)와 협의해야 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는 통신 품질을 유지할 의무가 콘텐츠공급자(CP)가 아닌 인터넷서비스제공사업자(ISP)에 있다는 논리를 재확인한 판결로 페이스북·구글·넷플릭스 등 글로벌 CP들은 국내 통신사들과의 망 사용료 협상에서 더욱 힘이 실리게 됐다.
◆ 방통위 "항소 준비 및 제도개선 힘쓸 것"
통신업계는 난감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번 소송이 직접적으로 글로벌 CP기업의 망 이용대가랑 직접적인 연관 없이 소비자 피해를 줬는지 여부를 가리는 소송이다. 하지만 현재 글로벌CP가 국내 통신사들과 망 대가 협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통위의 망대가 가이드라인이 동력을 잃을 수 있고 페이스북이 협상 중 강경한 입장으로 태세를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CP들이 스스로 트래픽을 조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접속경로를 바꿔 국내 이용자들에게 민원을 일으켜도 이에 대한 불만들은 국내 통신사들이 모두 떠안는 구조가 이어지는 만큼 페이스북 사태가 재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방통위는 이번 선고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즉각 항소에 나설 방침이다. 방통위는 입장문을 통해 "향후에도 방통위는 글로벌 콘텐츠 제공사업자의 불공정 행위와 이용자이익 침해 행위에 대해서 국내사업자와 동등하게 규제를 집행하는 등 국내외 사업자간 역차별 해소를 위해 노력 할 것"이라며 "판결문 등을 참조하여 제도적인 미비점은 없었는지 점검하고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항소심을 준비하면서도 글로벌 CP들의 이용자 보호나 통신 품질 유지 강화 의무를 질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다만 CP들의 의무사항을 강화할 경우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CP들까지 더욱 옥죌 수 있어 제도를 구체화하는 과정도 험난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