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나은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은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스크린으로 옮겨냈다. 단순히 잘 복사해서 잘 붙여넣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3년간 멈췄던 소설의 시간에 숨을 불어넣어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마치 2016년의 김지영 씨가 2019년의 김지영 씨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남편 대현(공유)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1982년생 김지영(정유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선 모습으로 말을 거는 김지영을 목격한 대현은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대현은 지영이 병원에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건망증이 심해진 정도로 생각하는 아내에게 직접 증상을 말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이후 지영의 일상과 함께 그녀가 과거에 겪은 이야기들이 하나씩 펼쳐지며 왜 지금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에피소드를 축약해 전달하는 전반부와 소설에 담기지 못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후반부로 나뉜다. 김지영의 인생을 과거부터 시간 순서대로 그렸던 원작과 달리, 영화는 2019년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원작이 할머니와 어머니, 언니 등 여성 인물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남편과 가족들의 비중을 높였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 전반부가 매끄럽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원작 소설을 압축한 전반부가 한 세대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에 맞춰 한 사람의 이야기로 담았기 때문이다. 원작 출간 당시엔 명절 에피소드와 어른들의 아들 챙기기, 직장 내 몰카 등 누구나 겪고 목격했지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잘 인지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로 충격을 줬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한 이야기가 됐다. 영화가 에피소드들을 억지로 나열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소화하며 한 사람의 이야기로 녹아들게 애쓰는 모습이 눈에 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작품 외적인 요소로 평가받고 논란을 일으키는 영화도 드물다. 그럼에도 감독은 자신이 본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시원하게 전개해나간다. 원작을 쓴 조남주 소설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했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다. 인물과 거리를 두고 설명으로 이해시켰던 전반부와 달리,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인 후반부에선 원작에서 멈춰 있던 인물들이 직접 살아 움직인다. 그들의 감정이 하나하나 느껴지고 이입되면서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데도 갈수록 몰입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2016년엔 고통받는 모습만 보여줬던 김지영 씨가 2019년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김지영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김미경이다. tvN 드라마 ‘또 오해영’, KBS 드라마 ‘고백부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극적인 순간에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또 공민정, 박성연, 이봉련, 예수정, 염혜란, 김국희 등 작은 역할에도 전력으로 열연하는 여성 조연배우들의 모습이 몰입을 돕는다. 23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