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불편함이 쓰레기를 분리해 배출하는 일이었다. 제주 시내에서는 겪지 않을 불편함인데 주거밀집지역이 아니다 보니 분리수거장이 꽤 떨어져 있고 요일별로 수거하는 재활용품이 달라 잠시 방심하면 꽤 많은 양을 쌓아놓고 지내게 된다. 11월 말에 혼사가 있어 집에 와서 2주일을 머물고 다시 제주에 왔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도롯가에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배출방식 변경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제주에서 나오기 전 깨끗이 정리한 터라 깊은 관심을 두지는 않고 있었다. 며칠을 지내고 쓰레기가 정리할 만큼 쌓여 예전처럼 몇 가지로 분류해서 수거장을 갔더니 음식물 쓰레기 수거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잔액이 5,000원 이상인 티머니 교통카드를 넣고 음식물을 올리면 무게에 따라 배출비용이 빠져나가고….’ 이용방법만 읽고 돌아왔다. 기계를 상대로 사정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함덕리사무소나 조천읍사무소에서 카드를 받아야 한다니 결국 주말 이틀 동안 냄새를 견뎌야 했다. 그렇게 내 주변의 작은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
삼십 대 초반에 네 번째 직장에서 삶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출근과 퇴근 시간이 늘 일정해서 아이들 돌보기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걱정거리라 할만한 일도 없으니 내 30대는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 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 기반 위에 40대의 황금기를 맞이할 줄 알았다.
그날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쓰러져 병원에서 CT를 찍었는데 당장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단다. 인천 변두리의 크지 않은 병원이었다. 근무하던 을지로의 서울백병원으로 이송을 부탁하고 병원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쪽 병원의 의사는 뇌출혈이고 출혈량이 주먹 크기라고 하며 의식은 없다고 했다. 그 해 1997년 늦가을 40대와 50대의 삶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어머니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소방서 구급 차량 편으로 신경외과 전문의도 없었던 그 작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뇌 컴퓨터단층촬영을 하고 이송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네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내가 근무하던 대학병원 응급실에 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22년 전 그날 뇌졸중이 의심되는 환자를 응급처치가 가능한 대학병원이 아니라 그 작은 병원으로 이송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응급실에 도착한 어머니는 이미 의식이 전혀 없었다. 응급검사 결과 출혈 부위가 워낙 위험한 곳이어서 수술은 불가능했다. 다만 뇌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출혈 부위까지 관을 넣어 혈액을 배출시키는 시술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북쪽 바다를 향해 솟은 서우봉은 마치 병풍처럼 서쪽의 함덕과 동쪽의 북촌을 가로막고 있다. 함덕에 온 관광객들 대부분은 해변에 머물거나 차를 타고 이름 있는 관광지를 찾아가지만, 북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서우봉을 넘어가면 그 아래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 북촌이고, 버스를 타거나, 또는 차를 운전해서 동쪽 어느 곳을 찾아가더라도 지나는 곳이 북촌이지만 이곳을 궁금해하고 이곳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늘 조용한 마을이 북촌이다.
올레 19길을 걸었다. 조천의 만세동산에서 시작해 함덕을 지나 서우봉을 넘어간다. 서우봉에 올랐을 때 동쪽 멀리 보이는 풍경은 서쪽보다는 더 시원하게 보인다. 북촌을 향해 내려가는 길은 특별하지는 않았는데 그 길 끝에서 색다른 안내표지를 만났다.
빨간색의 화살표 모양 표지판이었는데 그 안내문의 제목이 ‘서모오름(서산 西山)’이었다. 이어지는 글에 따르면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 서산, 서산망, 서산봉으로 표기된 서모오름에 조선 시대에는 서산봉수가 있었다. 그리고 ‘북촌 주민들은 이 오름이 일제 잔재 서우봉이 아니라 서모오름 또는 서모봉으로 불리기를 기대한다’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서우봉 산책로에서 본 ‘남서모’라는 명칭이 떠올라 이유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의 상흔인 진지동굴을 잠시 살피고 북촌 마을로 들어섰다. 올레 표식이 앙증맞은 크기의 해동포구를 돌아 잠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집 담장 앞에 마모되어 글씨가 흐려지기 시작한 비석 두 개와 그 옆에 새로 새긴 송덕기념비가 보였다. 1967년 우물을 만들게 된 과정을 새로 새겼다. 비석엔 우물을 만들 때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보였는데 지금의 가치로 오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을 낸 사람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조천리, 신흥리, 함덕리를 거쳐 북촌리까지 오는 동안 마을공동체에 크고 작은 성금을 보탠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 석물이 마을마다 세워져 있었다. 베푸는 마음을 고맙고 귀하게 여기는 풍습을 보며 마음이 흐뭇했다.
올레 표식이 마을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야 북촌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고개를 갸웃하며 걷다보니 길가 밭담에 누군가 갖가지 동물을 연상시키는 괴석을 얹어두었다. 하나하나 살피는데 지나가던 주민이 ‘보기 좋지요?’하고 말을 건넨다. 그와 말을 나누며 걷다 밭에서 일하던 다른 주민들을 만나 함께 앉았다. 간식거리로 가지고 있던 귤을 내민다. 올레가 마을을 지나는 이유를 알 듯하다.
올레 표식을 따라가다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를 만났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이 일대가 너븐숭이다. 늘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길가엔 ‘너븐숭이 4.3 유적지’라는 간판이 서 있고 그 안쪽에 ‘너븐숭이 4.3 위령성지’ 석물과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도 이곳에 있다.
1949년 1월 17일 세화에 주둔해있던 병력이 함덕으로 가던 도중 이곳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2명이 숨졌다. 마을 원로 주민 9명이 군인 시신을 함덕으로 운구했는데 이들 중 경찰 가족 1명을 제외한 8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해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날 오전 11시 군인들이 북촌에 와 1천여 명의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는 마을을 불태웠다. 오후 4시경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군인들은 수십 명씩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날 집단으로 미쳐 날뛰던 무장군인들의 총 앞에서 300여 명이 희생되었고 이후에도 100여 명의 주민이 더 희생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까지 아무도 이 끔찍한 사건을 입에 담지 못했다.
아직 이름도 얻지 못했던 아기들은 아무개의 자로 희생자 명단에 올라 있다. 그 아기들의 무덤이 ‘순이삼촌’ 문학비와 ‘너븐숭이 4.3 기념관’ 사이에 작은 돌로 테두리를 두르고 있다. 그 위에 누군가 얹어 놓은 장난감과 사탕과 달걀과 귤을 보다가 눈물이 났다. 더 걸을 수 없었다.
무심하게 차를 타고 지나다녔던 길가에 섰다가 걸어서 함덕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마을 주민 9명이 군인 시신을 함덕까지 옮겼던 그 길을 걸었다. 차들이 씽씽 스치고 지나갔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전혜선 jes5932@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