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 이 기사에는 영화 ‘사냥의 시간’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경제 시스템이 무너진 2030년대 후반, 대한민국. 5만 원권 지폐는 휴짓조각만도 못한 처지가 되고 거리는 시위 중인 해고 노동자들과 집을 잃은 빈민들로 어지럽다. 코앞으로 다가온 질식의 날. 교도소에서 출소한 준석(이제훈)은 친구들을 불러모아 마지막 ‘한 탕’을 제안한다. 지난 23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윤성현 감독의 신작 ‘사냥의 시간’의 내용이다.
“가상의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 많지 않은 만큼, 귀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사냥의 시간’ 공개 다음 날 온라인 화상 인터뷰로 만난 배우 안재홍은 “공간 속에 흠뻑 빠져서 뛰어놀았던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로케이션부터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준비돼 있었어요. 덕분에 상상력을 크게 발휘하지 않아도, 그 시대와 공간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안재홍이 연기한 장호는 입이 걸고 행동도 거칠지만 알고 보면 외로움을 많이 타고 유약하다. 천식 때문에 흡입기를 달고 살고 군대에도 다녀오지 않아 총기를 다루는 데 어색하다. 게다가 친구들 앞에서 코까지 골며 자는 체하는 특이한 버릇도 있는데, 기훈(최우식)은 “가만 보면 졸라 ‘관심병자’”라며 혀를 찬다. 안재홍은 이런 장호를 ‘외로움을 많이 타고 의존적인 성향이 강한 청년’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한다.
“장호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가족 혹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일찍부터 폭력에 노출됐던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이나 상처도 깊을 것 같았고요. 그래서 준석이와 기훈이가 장호에겐 세상 전부일 거고, 그 외의 사람들에겐 배타적일 거라고 생각했죠. 감독님은 ‘장호가 영화의 정서를 운반하는 역할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거칠고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이지만 이유와 동기가 분명하잖아요. 후반부엔 관객이 장호에게서 페이소스를 느껴 그를 지지하게 되길 바랐어요.”
겁 많던 장호가 도박장 털이에 나선 것도, 추격자 한(박해수)에게 맞서 총구를 겨눈 것도 친구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외로움의 심연에서 몸부림치던,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신을 혼자 두지 말라던 장호는 마지막 순간 “나 이제 외롭지 않아. 혼자 있고 싶어”라며 눈을 감는다. 안재홍은 ‘사냥의 시간’을 “청춘의 성장기”로 봤다. “벼랑 끝에 선, 희망 없는 청춘이 의지를 갖고 사건을 돌파해나가면서, 마침내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다고 얘기하는 게” 장호의 핵심 서사라고 느껴서다.
‘사냥의 시간’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청년들의 성장담인 동시에 액션과 심리 스릴러가 교차하는 장르물이기도 하다. 특히 카 체이싱 장면에선 장호의 특기가 빛난다. 안재홍은 “촬영 때도 내가 직접 차를 운전했다”며 뿌듯해했다. 그는 이 장면이 “핸디캡이 있는 인물이 장기를 발휘할 때의 쾌감과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며 “짜릿했다”고 말했다.
다만 영화를 향한 관객의 반응은 엇갈린다.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돼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지만, 서사가 불친절해 ‘영화를 보느라 내 시간이 사냥당했다’는 불만도 나온다. 안재홍은 “아직 반응을 많이 찾아보진 못했다”면서도 “베를린영화제에선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관객들이 몰입해서 봐주셨다. 1600석이 넘는 대극장이 매진됐다. 무대 인사 때까지도 관객들이 극장을 떠나지 않고 손뼉을 쳐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제훈, 최우식, 박정민 등 함께 호흡한 동료 배우들과는 ‘사냥의 시간’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30대 중반의 남자 배우들은 어떤 고민을 나누고 있냐’고 물으니 “별다를 것 없다. 좋은 작품을 만나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게 연기자로서 가장 좋은 갈망”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돌아보면 안재홍도 지난 11년간 여러 인물을 입고 벗었다.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tvN ‘응답하라 1988’에선 착하고 웃긴 동네 형 정봉을, KBS2 ‘쌈, 마이웨이’에선 긴 연애의 권태에 시달리는 주만을 연기했다. 때론 자신이 메카폰을 잡기도 한다. 안재홍은 단편영화 ‘열아홉, 연주’ ‘검은 돼지’의 극본과 연출을 직접 맡았다. 요즘엔 로드 무비를 만들고 싶어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고 한다.
“2년 반 전, 처음 ‘사냥의 시간’의 시나리오를 건네받았을 때부터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요. 양극단의 감정으로 저를 몰아붙였던 시간이었죠. 그래서 감회가 새롭고, 또 영화가 오래도록 남길 바라요. 장호처럼 저 스스로를 극복한 경험이요? 글쎄요, 체중 감량? 하하. 농담이고, 지금도 극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그때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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