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좌보미오름의 오봉

제주도에서 1년…좌보미오름의 오봉

기사승인 2020-05-09 00:00:00

제주에서 새우란과 함께 5월을 맞았다. 지난 해 11월 나뭇잎이 거의 졌을 즈음 거문오름에 갔을 때 새우란 군락을 보았다. 한두 촉도 아니고 수십 촉의 새우란이 풀과 나뭇잎이 누렇게 변하고 나서야 초록의 잎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을 앞둔 잎이 풀잎 위에 누워 있었다.

4월 말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말에 손꼽아 때를 기다리다가 연초부터 온 나라를 휩쓴 코로나 19 폐렴의 소동 속에 거문오름 방문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거문오름을 보려면 방문예약을 하고 해설사를 따라 지정된 경로로 단체 탐방을 해야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다행이 2월 초에 걸었던 물영아리오름의 탐방로에서 많은 새우란 무리를 보고 4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중순의 짧은 고사리 장마가 끝날 무렵 외지 사람들은 거의 찾지 않는 오름에 갔다가 입구부터 통통하게 살 오른 고사리를 꺾다가 문득 새우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거문오름과 물영아리오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4월 말이 지나면서 오름마다 새우란이 지천이었다. 아내가 잠시 뭍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오름에 가 새우란을 만날 때마다 그 한 포기, 한 포기가 다 귀하고 특별하게 보여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40대 중반에 직장을 잃고 나서 다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나도 제법 잘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남보다 왜소하고 허약했던 탓에 남들과 어울려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없었다. 축구, 당구, 탁구 등 많은 사람들이 즐기던 운동마저 재주가 없으니 운동으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채 마흔 살이 되기 전에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주말에 산길을 걷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반도체 매뉴얼 번역을 시작하면서 달리기에 눈을 떴다. 매일 등에 땀이 날 정도만 천천히 달리다가 다리에 힘이 붙고 몸무게가 줄면서 달리는 속도와 거리가 늘었다. 일주일에 40km 이상을 헬스클럽의 트레드밀 위에 올라서서 달렸다. 가끔은 여기저기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해 보니 남보다 크게 뒤지지 않고 뛸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행복했다. 40대 중반에 달리며 마련한 체력으로 새 직장에서 15년을 버텼다.

건국대학교병원에 출근해 보니 홍보 관련 조직은 없었다. 새로 만들어야 했다. 12년 근무했던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도 처음 출근할 때 홍보 조직이 따로 없었다. 경영이든, 마케팅이든, 홍보든 따로 공부한 적도 없었던 내가 대학병원 두 곳의 홍보조직을 만든 셈이다. 그나마 전 직장에서 12년 동안 의학논문집을 계간으로 출간하면서 읽어낸 천 편이 넘는 각 분야의 의학논문을 통해 눈동냥으로 얻은 의학적 지식은 큰 재산이었다. 전 직장에서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은 이사장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며 귀동냥으로 얻은 우리나라 의료계의 전반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홍보의 개념을 몰랐다. 단 한 번도 내가 담당하고 있는 조직의 목표를 세우고 그 결과를 평가해 본 적도 없었다. 마흔 일곱에 시작한 새 직장에서 이 두 가지가 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내가 그리 붙임성이 좋거나 사람들과 활발하게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제주엔 이름 없는 오름이 없다. 그저 작은 언덕처럼 보여도 이름이 있다. 오름 뿐 아니라 큰 바위, 바닷가 절벽에도 다 이름이 있다. 그런 줄 알고 있으니 오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눈에 보이는 오름들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백약이오름은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부오름과 함께 제주 동부의 중산간 지역 오름 중 이미 유명세를 탄 오름이다.

이중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그 크기와 웅장한 분화구로 인해 오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한 번은 가보아야 할 곳이다. 용눈이오름은 그 생김새가 변화무쌍하고 높지 않을뿐더러 능선에서의 경관이 좋아 오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올랐다가 제주 오름의 매력에 빠지는 곳이다.

아부오름은 백약이오름과 함께 웨딩사진촬영 등 사진촬영에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일부 젊은이들은 오름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른 이들로부터 알게 된 사진촬영 장소만 잠시 발을 디뎠다가 가기도 한다. ‘나도 거기 갔다 왔어’하기 위한 방문이다.

제주에 와서 자연휴양림과 동백동산에서 곶자왈을 눈에 익히고 다랑쉬오름과 백약이오름에서 오름의 매력에 빠졌다. 백약이오름에서 보는 주변경관과 다양한 여름 꽃을 보며 다랑쉬오름이 여왕이라면 백약이오름은 공주쯤 되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그 주변의 오름을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좌보미오름은 제주생활 10개월 동안 올랐던 50곳의 오름 중 모양이 어느 오름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모양을 가졌다. 백약이오름을 오른쪽에 두고 서서 바라보면 왼쪽에 동검은이오름이 있고 성산일출봉으로 향하는 금백조로 정면을 막아선 듯 보이는 오름이 좌보미오름이다.

백약이오름을 오른쪽에 두고 차가 드나들 수 있는 농로를 따라 걸었다. 오름도 오름이지만 가는 길 양쪽으로 밭이 있고 야트막한 동산이 있으니 그저 한적한 시골을 걷는 기분이 괜찮았다. 그러나 늘 버스와 지하철에 길들여진 다리로 낯선 시골길 2km 걷기는 그리 쉽지는 않은데다가 도중에 걸어서는 건널 수 없을 정도의 흙탕물이 길을 가로 막고 있으니 호기롭게 시작한 걷기가 곧 후회로 바뀌었다. 그렇게 좌보미오름 뒤쪽에 펼쳐진 넓은 평지를 만났는데 말하자면 이곳이 좌보미오름의 분화구다.

좌보미오름 탐방로는 분화구 오른쪽에 소규모의 화산분출로 생긴 알봉을 포함해 다섯 개의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다. 첫 번째 봉과 두 번째 봉은 작은 산을 넘는 느낌이고 세 번째는 봉우리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언덕이다. 네 번째 봉이 좌보미오름의 주봉인데 제법 높고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도 깊다. 네 번째 봉의 능선에 올라 ㄱ자 형태의 능선 길을 걸어 그 끝에서 앞을 내다보면 봉우리 하나가 더 나타난다. 숲 속의 내리막길이 끝날 즈음 눈앞에 억새 무성한 민둥산이 보이면 좌보미오름 걷기가 끝난다.

마침 고사리가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고사리 찾아 꺾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힘든 줄도 모르게 백약이오름에서 좌보미오름까지 왕복 4 km의 농로를 걸었다. 좌보미오름은 걷기에 그리 녹록하지 않은 오름이다. 그러나 각 봉우리 위에서 잠시 잠깐 보여주는 사방의 풍경은 그 모든 수고에 대한 보답 이상이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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