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동 시계골목 '작은 발표회' 상공인·연구자·예술가·관람객 어우러지며 성황리에 마쳐

예지동 시계골목 '작은 발표회' 상공인·연구자·예술가·관람객 어우러지며 성황리에 마쳐

기사승인 2020-05-08 16:15:42

[쿠키뉴스] 김영보 기자 = 자전거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골목의 초입에 들어서자, 합판을 덧대 세운 노점들이 눈에 먼저 띈다. 노점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서울 한복판 예지동 시계골목. 그 한복판에 지난 2일 고사상이 차려졌다.

“오늘 '예지동 작은 발표회'가 열립니다. 우리 시계 귀금속 골목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께 연구자와 작가들의 결실을 소개하는 간소한 자리입니다. (…)”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노신사가 상기된 목소리로 한지에 가지런히 정서된 축문을 읽어내려갔다.

사진=예지상가 관리인 유종재가 축문을 읽고 있다.

지난 5월 2일과 3일, 이른바 '시계골목'으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예지동 예지상가에서는 '예지동 작은 발표회'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시계골목의 기술과 문화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은 전미영(서울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의 총괄 기획으로 사진가 집단 'B급 사진'과 도시연대, 이정은(시각문화연구자, 컨트리뷰터스), 김양우(작가), 안근철(아카이비스트) 등 청계천-종로 일대의 산업과 문화를 연구, 기록해온 주체들이 모여 전시·발표회를 연 것이다.

이날 행사는 예지동 한 가운데에서 진행된 고사식으로 막을 열었다. 지역 상공인들이 가게를 열 때 하는 개업식 고사의 사진을 발굴해 재현했다. 예지상가의 관리인이자 예지동 귀금속, 시계골목에 평생을 바쳐온 유종재 상가 관리인이 제주를 맡았다. 그는 고사 축문을 통해 "이곳에서 발전시켜온 기술들, 관계들을 앞으로 다른 곳에서라도 귀하게 이어나가서, 무형의 자산으로서 시계골목의 정신과 자산을 후세에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며 세운4구역 재개발 이후 예지동 상공인 공동체의 지속과 번영을 기원했다.

사진=예지동 시계골목 상공인들과 관람객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고사상은 종로시계기술인협회 장충락의 주도로 차려졌으며, 종묘 인근에 마련된 임시대체상가 세운스퀘어의 상인회 회장 유일렬, 원조함흥냉면 사장 배순희, 시계골목노점상인회 회장 김도갑 등 주요 인사들이 동참했다. 15여 년 동안의 재개발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인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고사상 앞에서는 함께 인사와 덕담을 나누었다.

이들은 이번 행사를 준비한 작가들과 오프닝을 보기 위해 참석한 손님들에게 시계골목의 역사를 소개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사에는 예지동과 관련 있는 외부 인사들도 다수 참여했다. 동서울대학교 시계 주얼리학과에서 시계 기술인을 양성하는 최진기 겸임교수(홍성시계)는 "선배 기술자들의 작업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이 진작부터 관심을 가지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주어 정말 고맙다”라고 말했다.

고사에 이어 본행사인 발표회가 예지상가 3층에서 열렸다. 서울 도심부 생산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성되고 기능해왔는지에 대한 박사학위논문(2013)을 썼으며 현재에도 관련 연구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심한별 박사가 진행을 맡았다.

사진=연구원 최혁규가 예지동 시계골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유종재는 '예지상가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예지동 귀금속상가와 시계골목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소개했다. 좁은 작업장이 밀집해있는 이 상가 건물이 1974년 준공 이후 1980년대 초까지는 노래방, 목욕탕, 당구장 등 생활편의시설이 모여있던 복합상가였으나, 이후 시계-귀금속 업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현재의 모습이 됐다는 내용, 재개발 과정에서 상공인이 마주하였던 갈등 등을 담담하지만 회한이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발표문은 토론자인 ○○(땡땡)은대학연구소 최영금 활동가와 함께 분량과 맥락을 조정하며 연습한 끝에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전미영은 '산업화 '너머'의 작업장'이라는 주제로 그의 인류학 학위논문을 요약 발표했다. 해당 논문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예지동 기술자들의 기술과 문화를 민족지적 현장연구를 통해 기록 및 정리한 것이다. 그는 "자동화기기로 대량생산해내는 공장기술과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손으로 원 재료를 가공하고 조정하는 예지동의 ‘시장기술’"이라고 소개하며 “사물을 고칠 수 있어야 만들 수도 있다. 예지동 시계골목과 같이 특정한 사물의 수리를 위한 기반이 잘 닦인 집적공간은 새로운 창작에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세 번째 발표자로는 SH연구원-도시연대와 함께 예지동 시계골목 실태조사를 수행했던 연구원 최혁규가 나섰다. 서울시가 기존 세운4구역의 시계산업을 보존하고자 시계특화거리 조성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발주한 연구 용역의 결과를 공유하면서, 시계 업종의 공간분포와 영업 및 조직의 현황, 시계 수리-복원 네트워크의 구성 내용 등을 담았다. 발표에 이어 다양한 기술 분야가 연계돼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시계 수리 산업에서 재개발 혹은 기술자의 은퇴로 인하여 기술과 작업장이 사라졌을 때, 이번 연구에서 밝힌 네트워크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마지막 발표는 '사라져가는 기술을 기록하기'라는 주제로 이정은이 진행했다. 그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3D프린터, 레이저 땜 등의 기술로 인해 사라진 귀금속 '원본 제작 기술'의 거점으로서 종로 일대에 대한 현장조사, 구술조사, 아카이빙 작업에 대해 소개했다. 은으로 가다(원본)를 제작하는 원본기술자들이 사용해왔던 용어를 정리한 <원본기술용어집>, 종로의 사라지는 금속공예 기술을 기록하고 정리해온 작업들, <종로의 원본기사> 단편 영화 제작 계획 등을 소개했다.

사진=관람객들이 예지상가 복도와 방에 걸린 전시작을 감상하고 있다.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예지상가의 다른 공간들에서는 5개의 전시가 동시에 열렸다. ‘B급 사진'이 기록한 에지동을 둘러싼 상공업의 풍경인 '기다림의 경관'들'', 안근철과 전미영이 문자판기술자 오석영과 함께 준비한 '보물책-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이정은의 '종로의 원본기사', 김양우의 '예지동의 움직임과 빛' 전시가 시간의 흔적으로 가득한 예지상가 구석구석에 자리잡았다.

'기다림의 경관'들''은 'B급 사진' 소속 작가 15명이 공동작업한 100여 점의 사진을 전시한 것으로, 예지동과 세운스퀘어의 상공인들,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지난 15여년 간 생활공간이 아닌 ‘사업’구역으로 인식되어 낡고 쇠락했지만 희망을 품고 있는 골목과 전경들을 담아냈다. '예지동 비디오로그'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진서현의 다큐멘터리 필름도 내걸렸다. 이 작품은 2019년 겨울 예지동의 면면을 담아낸 것이다.

'보물책: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전시는 안근철과 전미영이 예지상가 2층 문자판 복원 작업장 ‘예탑’에서 보유하고 있는 문자판 도안을 아카이브 한 기록이다. 도구와 작업 기록물과 실제 유물(문자판 도안집, 옛 동판, 도구)을 현재에도 영업 중인 작업장 바로 그 자리에서 선보였다. 관객들에게 문자판 복원 작업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객들이 아이패드로 수천여 점의 문자판 도안을 직접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원본기술의 방' 전시는 은퇴한 40년 경력의 원본기사 이 모 씨의 삶과 기술이 그가 몸 담았던 종로에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상전이었다. 이정은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모씨 개인의 일대기와 맞닿는 귀금속·장신구 산업의 기술 변화와 흥망성쇠, 제작의 의미와 가치를 원본기사 3인(이대연, 이창수, 양성필)의 목소리로 재조명했다. KCDF '2019 공예디자인 전시 공모'에 선정된 작품의 일부를 선보이면서, 기술자들이 실제로 사용해왔던 기술 용어를 정리한 <원본기술수첩>을 제작해 함께 전시했다.

사진=컨트리뷰터스 이정은이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예지동의 움직임과 빛' 전시를 통해 김양우는 예지동 일대의 상인들의 인터뷰, 작업 환경을 촬영한 기록물들과 작품을 소개했다. 카메라,시계,보석, 콘덴서 등 서울 종로구 예지동의 상인들의 기술과 작업 활동들을 기록한 영상 기록물을 보여주는 소규모 사업장에서 작은 부품들을 다루는 예지동의 상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기술과 작업 활동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게 했다. 이와 함께, 2018년 예지동에서 진행했던 작품 ‘Bright Inside’의 비디오 도큐멘트도 내걸었다. 이를 통해 예지동을 빛이라는 이미지로 해석해 예지동의 상인들의 인터뷰, 상인들의 갈고 닦는 기술, 구전되는 이야기들, 장소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들을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유종재, 전미영, 이정은, 안근철이 함께 준비한 <예지상가의 기록> 전시에서는 예지상가의 공간을 정리하면서 발굴한 기록물과 유물들이 선보였다. 폐간된 시계잡지, 재개발 이후 유명무실해진 상공업 조합의 기록물들, 오래 된 책상, 지금은 폐업한 골목식당들의 전단지 등을 통해 관람객들이 예지상가의 시공간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이날 전시, 발표회는 예지상가 옥상에서 '열린 뒷풀이'로 마무리됐다. 예지동 상공인들의 후원으로 전시자와 관람객 모두가 어울려 동동주와 음식을 나눴다. 상공인들이 평소에도 즐겨 찾는 인근 식당의 안주(홍어무침, 머릿고기 등)가 특히 호평을 받았다.

사진=예지상가 옥상에 마련된 '열린 뒷풀이'에서 상공인들과 전시자들, 관람객들이 음식을 나누고 있다.


한편, 예지동 시계골목을 포함한 '세운4구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상공인들의 이주는 빠르면 올 여름부터 시작된다.


kim.youngbo@kukinews.com

김영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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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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