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이 물건? '재난 강제동원' 법안에 의료계 부글부글

의료인이 물건? '재난 강제동원' 법안에 의료계 부글부글

재난기본법 ·남북의료교류법 등장에 반발..."유사 시 의료인들 북한에 차출한다' 루머도

기사승인 2020-09-01 04:30:02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예정된 전공의 파업을 하루 앞둔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병원 의사 파업으로 정상 운영이 어렵다'는 문구가 붙어있다.

[쿠키뉴스] 전미옥 기자 =의사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 정책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재난상황에서 의료인을 강제동원하겠다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돼 의료계가 발끈하고 나섰다. 여기에 북한 재난 발생 시 의료인력 등 긴급지원을 명시한 법안도 함께 거론되며 공분을 일으켰다.  

31일 의료계에서는 ‘의료인을 노예화하려 한다', '의료인이 물건인가' 등의 성토가 터져 나왔다. 의료전문가를 협의의 대상이 아닌 동원의 대상으로 격하시킨 법안이라는 지적이다. 

문제가 된 법안은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이 지난 24일 대표 발의한 ‘재난 및 안전관리법 일부개정안(재난기본법)’과 같은 당 신현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남북 보건의료의 교류협력 증진에 관란 법률안(남북의료교류법)’이다.   

황 의원의 재난기본법 개정안을 살펴보면, 이 법안 34조1항에는 재난 시 비축ㆍ지정ㆍ관리해야 하는 항목에 자제 및 시설 외에 ‘인력’을 포함하도록 했다. 

황 의원은 입법 취지로 “구제역, 메르스, 코로나19와 같이 의료인력 등 인적자원이 절실히 필요해도 법적 근거가 미흡한 실정”이라며 “현행법상 재난관리자원에 ‘인력’을 포함시킴으로써 재난 시 효율적 대응을 제고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현영 의원이 지난달 발의한 ‘남북의료교류법’도 덩달아 도마에 올랐다. 이 법안 9조에는 ‘재난이 발생할 경우 남북이 공동 대응 및 보건의료인력·의료장비·의약품 등의 긴급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북한 재난 발생 시 구조·구호 활동 단체에 정부가 필요한 지원이나 지도·감독을 할 수 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지난달 입법예고 기간이 종료된 이후 뒤늦게 주목을 받은 셈이다. 

▲국회입법예고시스템에 올라온 재난기본법과 남북의료교류법. 

의료계에서는 이들 법안을 두고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악법이다”, “의료인의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는 정책”이라는 반발이 높게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재난기본법’과 ‘남북의료교류법’이 상정될 경우 “정부가 우리 의료인들을 북한에 강제 차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한 입시정보 커뮤니티에는 이들 법안을 두고 ‘앞으로 의료인들은 유사 시 북한으로 차출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올라오기도 했다. 

또한 이날 국회입법예고시스템상 ‘재난기본법 개정안’ 입법예고 게시판에는 법안에 대한 의견제출 건수가 8만6000여건을 돌파했다. 대다수가 반대 의견이다. 

한 의견제출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말도 안 되는 법안이다. 의사 포함 모든 의료인들은 공공재가 아니다. 이들이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제발 그냥 두라”고 촉구했고, 또 다른 이는 “공권력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도 이날 성명을 통해 재난기본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개정안대로 34조 1항에 인력이 추가되면 49조와 연계되어 의료인에 강제동원명령을 내릴 수 있고, 이는 기존의 협력이 아닌 ‘동원’체계로 변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학회는 “그동안 많은 민간인과 의료인들이 자원하여 재난 현장에서 구호와 의료를 지원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손상, 감염 등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 이에 대한 보상규정조차 없는 실정”이라며 “개정안은 재난 극복을 위한 사회적 신뢰과 민관협력를 저해하고 민간 인력을 협의조차 없는 비축, 구비, 동원의 대상으로 보는 위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사위원장은(경희대병원)  "재난상황은 기본적으로 국가나 지역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사고나 자연재해, 감염병 사태다. 민간 전문가의 참여에 손해와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급박한 상황에선 의료진들이 유서를 쓰고 나서기도 한다"며 "이때 전문가 개인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결정과 자기동의에 기반해서 앞장서는 것이다. 이들을 단순한 동원의 대상으로 비하하는 것은 신뢰를 깎아먹고, 참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위중한 지금도 환자를 치료하러 달려나간 의료진이 감염될 경우 보상받을 수 있는 체계가 없다. 이런 규정부터 만들고 참여를 촉진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료계와 정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제성을 띈 법안들이 연이어 발의된 것에 유감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대하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전공의 파업이 진정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의 통제가 부당하다는 시각이다. 의료가 공공재라고 하지만 정부는 의사를 양성하거나 공공의료 운영에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의료인을 강제하는 법적 기반이 추가되는 것이 상당한 반발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상황에서 의료계 입장에서는 법안을 순수한 의도로 해석하기 어렵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발의된 법안과 관련해 의료계에서는 악용 소지에 대한 우려가 높다. 입법부인 국회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신현영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법안과 관련한 해명의 뜻을 밝혔다. 신 의원은 “해당 법안은 이전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법안을 바탕으로 통일보건의료학회와 검토 하에 남북보건의료 교류 활성화를 위해 제출된 것이다. '보건의료인력 지원'에 대한 부분은 실제 북한 의료인과 교류협력을 원하는 의료인을 상호 협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목적이었다"며 "우려의 시각이 있다면 당연히 수정 또는 삭제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romeok@kukinews.com
전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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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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