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뭐 이런 얘기가 다 있지’
영화 ‘미쓰홍당무’,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이 소설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처음 떠올린 생각이다. 이 작품을 뻔뻔한 만화처럼 풀어내면 신선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영상화하는 작업에 흥미가 생겼다. 흰 가운을 입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안은영 캐릭터의 만화같은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이 지난달 25일 공개된 이후 각종 SNS와 커뮤니티는 이 독특한 드라마 이야기로 가득했다. 이미 2년 전 넷플릭스가 ‘보건교사 안은영’을 제작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정세랑 작가와 이경미 감독, 배우 정유미의 만남이 화제가 됐다. 공개된 6회 분량을 본 시청자들은 낙천적이고 통통 튀는 정세랑 작가의 원작 이야기와 괴랄한 ‘이경미 월드’ 이야기,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정유미의 표정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난 6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화상으로 만난 이경미 감독은 “내가 쓴다면 절대 쓸 수 없는 이야기”라며 “넷플릭스 플랫폼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고 연출 계기를 털어놨다. ‘명랑 판타지’였던 원작 소설과 달리 그가 연출한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상하고 어두운 면이 많은 작품이 됐다. 성장하는 드라마로 그려야했기 때문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이 작품이 여성 히어로물로 가는 프리퀄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시즌1은 안은영의 성장 드라마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죠. 안은영은 자신의 운명과 주어진 능력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때론 숨기고 싶어 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보다 대의적인 의미를 위해 이타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는 드라마여야 다음 시즌으로 넘어갈 때 새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성장 드라마로 가려면 늘 밝게만 갈 순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깨는 게 근본적인 성장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주인공이 큰 위기를 겪어야 하기 때문에 가슴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경미 감독은 이야기가 현장에서 배우들과 마주칠 때 생기는 화학작용에 주목하며 작품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하면 더 재미있는 것들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제안하고 시도한다. 6회에 등장하는 노래방 장면에서도 오리가 등장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노래방 주인아저씨의 동물 반입 반대로 아쉽게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했다. 배우들이 캐스팅되고 촬영을 진행하며 만들어간 요소도 많다.
“전 ‘보건교사 안은영’뿐 아니라 캐스팅이 되고 촬영하면서 만들어가는 편이에요. 각본을 쓸 때 생각했던 이미지와 배우가 현장에 들어와서 생기는 새롭고 재밌는 것들이 있거든요. 안은영을 연기한 정유미 씨는 제가 각본을 쓰면서 상상했던 부분과 맞는 부분이 있어요. 유미 씨만의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한 표정이나 동작들, 동시에 유미 씨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이 있거든요. 유미 씨의 그런 요소들 덕분에 작품이 더 풍부해진 것 같아요. 홍인표는 각본을 쓸 당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재밌어졌어요. 제가 생각했던 인표는 지금처럼 유머러스하진 않았거든요. 좀 심심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주혁 씨가 들어오면서 재밌고 웃겨졌어요. 캐릭터가 새로 만들어진 부분이 있는 거죠.”
이경미 감독은 학생들이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는 장면을 “명랑하고 미친 것 같은 10대 청소년의 명량톤”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엔 매번 학교와 학생들이 등장한다. ‘미쓰 홍당무’는 선생님 양미숙(공효진)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고, ‘비밀은 없다’는 김연홍(손예진)이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단서를 찾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감독은 학교를 “우리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했다.
“전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답답한 일들, 사건 사고들을 보면서 교육 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릴 때 학교를 다니면서 경험한 것들이 알게 모르게 성인이 돼서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늘 생각하다 보니까 학교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 같아요. 전 작품에서 학생들이 학생들답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제일 싫은 건 미화시키고 포장하는 것. 너무 싫어요.”
이경미 감독은 인연이 깊은 박찬욱 감독에게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반응이 너무 좋던데?”라며 박 감독의 딸이 친구들과 같이 보는 이벤트를 열었다는 이야기였다. 동료 감독들이 “굉장히 무난하다”고 했다는 반응도 전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전화도 하셨고 문자도 보내주셨어요. “너무 재밌다”면서 “정말 이렇게 끝내기야”라고 하셨죠.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김지운 감독님도 ‘미친 이경미 월드가 자랑스럽다’라는 문자를 주셨고요. 여러 동료 감독들이 굉장히 신나하는 거 같았어요. 제가 만든 것 중에 가장 대중적이라는 얘기도 들었고요. 제가 보기엔 큰 차이가 없는데, 만화적이고 코믹한 느낌과 기분 좋게 하는 인물들이라 그렇게 느끼나 싶기도 해요. 그건 원작의 힘이라 제가 덕을 본거죠. 차기작은 아직 못 정했어요. ‘보건교사 안은영’ 전에 굉장히 하고 싶었던 소설 시리즈가 있어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데 차기작이 될 진 모르겠어요. 죽기 전까지 작품을 많이 만들고 싶어서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부터 빨리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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