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새 방향성 제시한 ‘옷소매 붉은 끝동’ [TV봤더니]

사극의 새 방향성 제시한 ‘옷소매 붉은 끝동’ [TV봤더니]

기사승인 2022-01-03 19:51:42
MBC ‘옷소매 붉은 끝동’ 포스터. MBC

왕과 궁녀의 사랑이 얼마나 많았나. 궁궐 속 여인을 조명한 작품은 어땠나. 궁중 암투, 시기, 모략,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안달 난 여자들… 지금껏 사극이 여성을 그려온 방식이다. 아들을 낳는 것만이 그녀들의 목표이자 최고의 미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시대의 이야기였다.

지난 1일 종영한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궐 속 여성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주인공 성덕임(이세영)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인물이다. 동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사 일을 하는 것도, 여관(女官)으로서 상전을 보필하는 것도 그에겐 전부 소중하다.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 시대에도 덕임의 자아는 뚜렷하다. 어떤 소용돌이에도 휩쓸리지 않고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지켜내는 것. 덕임에게 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런 덕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변수가 등장한다. 정조 이산(이준호)이다. 세손과 궁녀로 만난 두 사람이 위기를 함께 이겨내는 동안 서로에게 연심이 싹튼다. 하지만 덕임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긴다. 저돌적으로 고백하는 왕을 매몰차게 거절하며 “저하를 연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극에서 덕임은 ‘연모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이산의 옷자락을 슬쩍 잡는 정도가 전부다. 드라마는 이를 ‘작은 허세’로 표현한다. 연심을 꺼내 보이지 않는 건 덕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활달하던 덕임은 승은을 입고 달라진다. 상궁이 된 덕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쩌다 흠이라도 잡히면 이산의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덕임이 할 수 있는 건 처소에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지금까지 사극에서 승은을 입는 건 궁녀의 최고 목표이자 업적으로 그려졌다. 후궁이 된 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덕임의 모습은 사극 속 여성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후궁이 되고 자유롭던 과거의 자신에게 안녕을 고하는 덕임.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녀가 승은을 입는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담아내며 호평을 얻었다. 방송화면 캡처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궁궐은 여성의 자유를 옥죄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선대왕 영조의 비, 정순왕후(장희진)는 이산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왕실의 어른이다. 하지만 오라비가 죽어도 상복을 입을 수 없고, 조문 역시 갈 수 없다. 오라비의 비보를 들은 그는 애통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누가 우리를 이곳에 가두었을까요. 아홉 개의 담장을 두어 가두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막았을까요. 궁궐은 참으로 화려한 감옥이지요.” 정순왕후는 서슬 퍼런 권력을 과시하거나, 인자하고 자애로운 현모양처로 그려지던 전형적인 중전과 다르다. 구중궁궐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삶을 부귀영화가 아닌 억압으로 풀어낸 건 ‘옷소매 붉은 끝동’의 가장 뚜렷한 차별 지점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로맨스를 그리는 방식도 독특하다. 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덕임이 자신의 사람이 되길 거부하자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이산은 덕임의 뜻을 존중해 그를 연모함에도 궁녀로 살게 했지만, 대비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후궁으로 삼고자 한다. 이산은 덕임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뜻을 거두겠다”며 선택권을 주고, 덕임은 10년 넘게 거절해 온 그의 마음을 그제야 받아들인다. 궁궐을 활보하던 덕임이 자신의 의지로 후궁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꿈 많은 궁녀 덕임은 이산의 여자가 되며 억압된 삶으로 발을 내디딘다. 16회에서 휴가를 얻은 동무를 배웅하며 과거의 자신에게도 안녕을 고한 덕임의 모습은, 그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극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시집 ‘시경’은 덕임과 이산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북풍은 차갑게 불고 눈은 펄펄 쏟아지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붉지 않다고 여우가 아니며 검지 않다고 까마귀 아니랄까”,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수레에 오르리.” 덕임과 이산이 낭독한 이 구절처럼, 붉지 않아도 여우는 여우이며 검지 않다고 해도 까마귀는 까마귀다. 말로 직접 표현하지 않아도, 덕임의 행동은 분명한 사랑이다. 구중궁궐 여인들의 애환과 함께 왕과 궁녀의 절절한 사랑을 담아낸 ‘옷소매 붉은 끝동’. 이 작품이 제시한 새로운 방향성이 앞으로 나올 사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된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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