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기준, 국민 3977만여명이 가입한 보험이 있다. ‘실손의료비보험(실손보험)’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가입자 10명 중 9명은 이율배반적으로 청구를 포기한 경험을 토로한다. 반면 보험회사들은 지급보험금이 계속 늘어 손해율이 높아진다며 울상이다. 의료기관을 비롯한 의료계는 “실손보험 있으신가요” 한 마디 했다가 ‘수전노’로 매도당하고 욕을 먹는다.
혼란은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보험금 청구과정에서 겪는 소비자 불편을 최소화하라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주문하며 시작됐다. 하지만 논의는 14년째 ‘공전’ 중이다. 와중에 정부가 교통정리에 나섰고, 국회도 뛰었다. 21대 국회 개원 후 2년여 간 관련법 개정안만 6건이 발의됐다. 대선과정에서는 공약이 등장했고,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추진동력도 얻었다.
이를 두고 보험업계는 냉소를, 의료계는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충돌하고 있다. 13년이 지났지만 충돌 양상은 달라진 바가 없다. 의견접근도 거의 이뤄지지 않아 보인다. 의료계는 여전히 개인의 의료기록이라는 민감정보를 보호해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반대로 금융계는 소비자들의 편의성 증대와 재산권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과연 이번엔 바뀔까?
소비자를 위하여? 공통명분 뒤 엇갈린 의도
의료계와 보험회사를 중심으로 한 금융계가 내세운 명분은 모두 환자 혹은 가입자로 불리는 소비자들의 편익 증대와 닿아있다. 의료계는 청구간소화가 △의사와 소비자의 진료결정권과 선택권을 침해하고 △의료 행위나 기술의 획일화 또는 퇴보를 야기하며 △종국엔 민간보험사가 이익을 보는 변화라고 반대이유를 꼽는다.
반면 금융계는 국회에 제출된 법안들에 이미 진료정보 등을 악용해 보험을 거절하거나 취소하는 등 ‘목적 외 활용’ 행위를 막는 내용이 명시돼 있어 우려는 기우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기관을 거칠 경우 회사가 이를 통해 의료행위를 막거나 위축시키는 등 부정적 개입을 할 수 없는 구조라고 강조하며 찬성의 뜻을 피력한다.
오히려 보험금이 자동청구되면 소비자들의 편의성과 편익이 증대하고, 보험회사 또한 내부적으로 청구정보의 전산화나 서류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력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의료기관이나 의사 또한 보험청구를 위한 별도의 행정적 부담이나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실이 없다고 주장한다.
명분 뒤에 가려진 진실은… 결국 ‘돈’?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누가 ‘이윤’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 있었다.
당장 의료기관들은 진료행위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정부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비급여 행위를, 나아가 실손보험에서 지급이 이뤄지기에 환자의 저항성까지 낮은 실손보장형 비급여 진료행위를 늘리려는 유혹에 많이 노출된다. 이는 부대수입을 기대할 수 없고 적자가 뻔한 건강보험 진료행위조차 박리다매식으로 늘릴 수 없는 동네의원급 의료기관 일수록 더하다.
한 의료기관 종사자 A씨는 “솔직히 건강보험 수가는 의료행위에 대한 비용조차 충당하기 힘들다. 그런데 간호사 월급에, 병원 운영에 들어가는 전기료며 임대료는 어디서 주지 않는다. 그럼 결국 비급여 진료를 하거나 의료기관용 의약품 따위를 내다팔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한탄 섞인 반문을 내뱉으며 “안 그러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반대배경을 토로했다.
보험사들도 ‘돈’ 때문인 것은 마찬가지다. 실손보험으로 인해 늘어나는 지급금과 소비자들이 보낸 서류들을 자체적으로 전산화하고 심사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을 줄이는 1차 목적을 표면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지급금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관리·통제할 수단을 확보해 지출비용을 줄이겠다는 2차적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보험업계 고위관계자 B씨는 “보험회사가 (실손보험)청구간소화를 찬성하는 직접적인 배경으로는 전산화에 따른 소요비용이나 손실율(보험금 지급에 따른 이익 감소분)을 줄이겠다는 의도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비급여 진료비의 표준화나 심사강화와 같은 관리·감독 강화로 지출비용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해법과 선결과제는… 건강보험 수가체계 개편?
일견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간이 수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각계가 우려하거나 항변하는 말들 또한 납득할 수 있는 지적이고 주장이기도 하다. 보험업계 종사자이면서도 의료계의 우려에 동조하는 이들이나, 의료 종사자지만 주장에 동의를 표하는 이들 또한 없지 않다.
한 보험설계사 C씨는 “전적이지는 않지만 의료계의 반발과 이에 동조하는 이들의 생각에 동의한다”며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보험사들은 보험신용정보통합조회시스템(ICIS)를 활용해 보험금 청구이력을 보험인수심사(계약)에 활용하는 경우 등을 보고 있자면 단순히 비약이 아니라 더한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반대로 의사 D씨는 “최근 논란이 된 생내장 수술이나 과거부터 문제시돼온 도수치료 과잉과 같이 일부 의료기관의 극단적 수익추구로 인해 의료계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소비자들의 청구편의나 자원절약 등을 위한 청구간소화에는 공감한다”고 보험업계의 의견에 긍정적 견해를 내비치기도 했다.
다만 D씨는 “양측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익을 늘려야하는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서로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않겠냐”며 “(청구간소화의)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이어 “각자가 상대방이 적정선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를 갖는다는 전제 하에 선의가 이어질 수 있는 수익구조가 갖춰져야 비로소 간소화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료기관이 비급여 진료를 해야만 연명할 수 있는, 그래서 환자의 저항성이 적은 ‘실손보장형 비급여’ 진료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낮은 건강보험 행위수가 체계를 개선한다면, 자연스레 보험사들의 손실율이 낮아지고 비급여 통제를 위한 관리·감독에 대한 요구도 줄어들어 신뢰가 쌓이고 청구 간소화가 실현되는 선순환이 가능할 것이란 해석이다.
‘민간주도’ 청구간소화 체계 확립… 또 다른 해법 될까
한편, 건강보험에서 보장하는 행위수가에 대한 체계 개편이 현행 보건의료정책 구조 상 불가능에 가까운 난제라는 점을 들어 또 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실손보험과 청구간소화, 수익구조 개선 등이 모두 민간영역을 대상 혹은 주체로 하는 만큼 민간 주도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더구나 이미 완성단계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비급여 진료비 관리·감독에 대한 의료계의 우려도, ‘보험업법 개정’을 둘러싼 국회에서의 혼란도, 국가 차원의 강제력 행사에 따른 반발도 일소할 수 있는 방법이 민간 주도로 시도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민간 중심 청구 간소화 시스템이다. 실제 몇몇 핀테크 회사에서는 실손보험 빠른 청구 혹은 간소화를 가능케한 서비스를 구현해 일반에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핀테크업체 지앤넷이다. 지앤넷은 현재 인터넷전문은행인 ‘토스’ 등 은행들에서 제공하는 ‘실손보험 빠른청구’ 서비스나 600여개 의료기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실손보험 간편청구’ 서비스 등을 만들었다. 환자가 청구기능이 탑재된 제휴카드나 의료기관 내 무인결제기(키오스크), 은행의 페이서비스 등을 이용하면 결제내역에 해당하는 진료정보가 암호화돼 보험사로 전송되고, 보험금 신청이 전산 상 자동으로 이뤄지는 식이다.
이와 관련 김동헌 지앤넷 대표는 “현행 보험업법이나 의료법 체계 내에서도 충분히 청구간소화는 실현가능하며, 이제 2017년부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민감정보 유출이나 비급여 통제문제 등 의료계나 보험업계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덧붙여 “이미 법 개정 없이 민간주도로 청구간소화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는 방법을 정부 주도로 추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의료기관이나 보험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과 독려를 함으로써 민간에서의 논쟁을 민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정부를 향한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간주도의 청구간소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이들도 있었다. 정성희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4년을 지켜봤지만 민간 주도로 문제가 해결되긴 어려워 보인다”며 “현재 쓰이는 서비스들 간의 청구코드(기호) 통일이나 표준화, 방식 등이 상이하고 정작 필요한 의원급 의료기관이나 약국들의 제휴가 많이 이뤄지지 않아 제한적”이라고 평했다.
나아가 “의료계와 보험업계 각각의 주장이 상충되는 만큼 이를 조정하고 강제할 외부압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어느 의료기관이나 약국을 가도 청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보험사가 의료정보를 오·남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하는 만큼 법 개정과 국가권력 수준의 강제력을 통한 통제는 불가피한 것”이라며 정부 주도의 변화가 적절할 것이란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변화를 공언한 윤 정부가 어떤 대응과 방식을 내놓을지 이목이 쏠린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