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처럼 부드럽게 날아와 수채화처럼 번지는 음성. 가수 겸 배우 박효신이 입을 열면 한 편의 시가 펼쳐진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때로 서정시처럼 달콤하고, 때론 대서사시만큼이나 장엄하다.
지난달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한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도 그렇다. 2018년 초연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박효신은 열정적이고 순수한 청년으로 그윈플렌을 되살린다. 그는 탁월한 감정 표현으로 연민을 불러 일으켜 그윈플렌의 감정에 관객을 탑승시킨다. 시대정신을 제시한 동명의 원작 소설과 달리 주인공 미시사에 집중한 뮤지컬의 특징은 박효신을 통해 매력으로 승화된다.
배경은 왕이 신과 같은 권력을 가졌던 17세기 영국. 탐욕과 향락에 중독된 귀족들 사이에선 ‘애완용 기형아’가 유행하던 때. 그윈플렌은 어린 시절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에 납치당해 입을 찢긴 뒤 버려진다. 어떤 이는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어떤 이는 괴물인 그가 아름답다며 그를 욕망한다. 기이하게 찢어진 입은 그윈플렌이 원하지 않았던 무기징역 비극이다.
박효신은 괴물로 정체화된 그윈플렌의 상처를 섬세한 연기로 드러낸다. 가령 여공작 조시아나에게 불려가 얼굴을 보이는 장면. 그윈플렌의 입을 가린 머플러를 조시아나가 끈적한 손길로 내릴 때, 박효신은 체념한 듯 어깨와 고개를 웅크린다. 작아진 그의 몸은 그윈플렌이 겪어야 했을 멸시와 그로 인한 흉터, 나아가 그가 가졌을 자기혐오를 상상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그렇게 그윈플렌의 감정에 몰입한 채 그의 여정을 동행하게 된다.
‘웃는 남자’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아름답고 파워풀하며 열정이 깃들었다”고 평한 목소리는 박효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연기 도구다. 그는 다양한 질감의 목소리로 허구 세계의 그윈플렌을 구체적인 인물로 소환하고, 사랑·연민·두려움·분노·슬픔 등 그윈플렌이 느끼는 다층적인 감정도 호소력 있게 표현한다.
듀엣곡 ‘나무 위의 천사’를 서정시처럼 펼쳐내는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는 그윈플렌을 상냥하고 낭만적인 연인으로 느끼게 한다. 와일드혼이 박효신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대표곡 ‘그 눈을 떠’는 한 편의 대서사시 같다. 간절한 호소로 시작한 노래가 가난한 자들을 향한 연민과 슬픔, 버려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느끼는 울분을 경유해 “이제는 그 눈을 떠 봐”라는 외침으로 맺기까지, 관객은 그윈플렌과 함께 감정의 마천루를 오르내린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웃는 남자’는 광기와 분노의 협주곡이다. 다이내믹한 보컬, 긴 팔과 다리를 꺾어 만드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혼을 빼놓는 표정 연기가 어우러져 종합 예술을 완성한다. 그윈플렌이 겪는 감정의 낙차는 박효신의 곡 해석력으로 개연성을 얻는다.
혐오와 멸시 속에서도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그윈플렌의 여정은 훼손되지 않는 그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원작 소설이 귀족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극이라면, 시공을 뛰어넘어 한국에서 공연되는 ‘웃는 남자’는 더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박효신은 2018년 초연 당시 이 작품으로 제3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 제7회 예그린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