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예기치 않은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렸다. 프로포폴을 차명 투약한 연예인 A씨가 배우 하정우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사과와 함께 자숙에 들어간 지 2년, 하정우가 최근 넷플릭스 ‘수리남’과 함께 복귀했다. 지난 13일, 하정우는 ‘수리남’ 인터뷰를 위해 취재진과 대면하자마자 곧바로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사죄드린다”고 운을 뗀 그는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사려 깊게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2년은 그에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선물했다.
하정우는 ‘수리남’에서 국정원과 협력해 언더커버 마약상으로 잠입하는 주인공 강인구 역을 맡았다. 논란 이후 선보인 첫 작품이다. “영화를 선보이고 인터뷰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집을 나서는 기분이 낯설었다”고 말을 잇던 그는 “2020년은 도를 닦듯 시간을 보냈다”고 돌아봤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그때, 하정우는 한강에서 홀로 걸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의 저는 그냥 존재하기만 했어요. 무작정 걸으면서 배우로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자아를 성찰했죠. 지금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기다려야겠단 생각만 들었어요. 영화 ‘보스턴 1947’, ‘야행’, ‘피랍’ 등을 함께 작업한 모든 분들에게도 죄송했고요. 신은 누구에게든 다양한 시련을 겪게 하잖아요. 제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 생각했어요. 앞으로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마음으로 일에 임하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생각했어요. 본질을 돌아본 거죠. 열심히 달리면 되는 줄 알았던 저를 새로이 일깨우는 시간이었어요.”
‘수리남’과의 인연은 8년 전 시작했다. 영화사 퍼펙트 스톰에 들어온 15쪽짜리 기획안이 하정우의 마음에 들어왔다. 절친한 윤종빈 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표류하던 기획안은 영화 ‘공작’ 작업을 마친 윤 감독의 손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영화가 아닌 시리즈물로 방향을 튼 것도 그때다. ‘강인구는 하정우, 전요환은 황정민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점차 현실화됐다. 강인구는 이야기의 화자라는 점에서 하정우가 과거 연기한 몇몇 인물과 공통분모를 가진다. 하정우는 강인구의 출발점을 이전 필모그래피에서 찾았다.
“강인구를 연기하며 20대 막바지에 작업했던 영화 ‘비스티 보이즈’와 ‘멋진 하루’를 떠올렸어요. 사실 강인구는 쉽지 않은 캐릭터예요. 극을 이끄는 첫 번째 주인공이잖아요. 튀는 것보단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연기로 뭔가를 강조하긴 어렵죠. 윤 감독이 저와 ‘용서받지 못한 자’나 ‘비스티 보이즈’를 함께한 만큼 제 강점 때문에 강인구 역할을 제안한 것 같아요. 캐릭터가 식상해 보여도 극 전체를 볼 땐 안정적이란 판단이었겠죠. 제가 어릴 때 즐겨했던 표현법이나 대사, 리액션 등을 강인구에 녹여냈어요. 감독님도 그걸 바랐고요.”
식상한 캐릭터라는 말은 자조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 ‘군도’ 이후 하정우는 특색 있는 캐릭터보다 중심을 잡아가는 인물을 주로 맡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하정우의 연기가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정우는 “개성 강한 캐릭터를 표현하는 건 내 특기다. 하지만 제작진과 감독이 내게 따로 원하는 게 있는 것 같더라”면서 “작품 전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주연배우로서 할 일”이라며 지론을 펼쳤다. “캐릭터보단 영화 전반의 재미와 완성도를 생각해요. 그 안에서 인물을 새롭게 표현하는 게 숙제죠. 관객과 시청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하려 해요. 어려운 일이죠. 지금도 고민이 많아요.”
고민의 연장선에서 지금의 강인구가 나왔다. 하정우는 대본 속 그에게서 선한 의지를 봤다. 강인구는 돈 때문에 수리남에 갔지만, 전요환(황정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국정원 편에 선다. 하정우는 “처음 대본엔 전요환 조직에 들어가 내적 갈등을 겪는 강인구 모습이 더 있었지만, 6부작으로 결정되며 대부분 편집됐다”며 “개인적으로 아쉽다”라고 말했다. 전체 분량이 줄어도 ‘수리남’ 촬영 일정은 빼곡했다. 하정우는 “2021년은 개인적으로도 고됐지만 ‘수리남’ 촬영 역시 힘들었다”면서 “스트레스가 심해 목 디스크가 왔다. 오른팔이 저린 상태로 몇 개월간 촬영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이 된 건 그와 동고동락한 윤 감독과 황정민이다.
“제주도, 전주, 부산과 도미니카 공화국 등지에서 촬영을 진행했어요. (황)정민 형, 윤 감독과 늘 함께하며 다른 배우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죠. 정민 형은 20대 중반에 소속사 선배로 처음 만났어요. 당시 정민 형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수상소감으로 국민 배우가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도 신인이던 저를 늘 챙겨줬어요. 저예산 학생 영화였던 ‘용서받지 못한 자’ 시사회에도 와줬을 정도예요. ‘나랑 있으면 함께 주목받을 수 있다’면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도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나이를 떠나 배우를 늘 섬세하게 존중해주는 형이에요.”
고마운 사람들과 어렵게 만들었다. 영화가 아닌 시리즈물인 만큼 분량도 많았다.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물가에서 강인구와 전요환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가장 고됐던 작업이다. 힘든 만큼 ‘수리남’과 함께한 기억은 값지게 남았다. 하정우는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캐릭터에 몰입하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곤 했다”면서 “초심을 돌아본 소중한 시간”이라며 애틋해했다.
“과거의 제가 가졌던 몰입력을 마주한 것 같았어요. 잃어버린 걸 찾은 기분이에요. 제겐 정말 중요했던 것이기도 하죠. ‘수리남’을 보면 그때의 제가 가졌던 마음가짐이 보여요. 그게 참 아파서, ‘수리남’을 쉽사리 못 보겠더라고요. 하지만 연기에 집중하는 자세를 다시 찾은 것 같아 기뻐요. 예전 같았으면 새로운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게 마냥 설렜을 텐데, 이번엔 마음이 조금 복잡해요. 보신 분들이 이 작품과 캐릭터를 어떻게 보고 그 안의 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것 같아요. 지금 저는 발걸음을 다시 내딛고 있으니까요. 한 걸음씩 나아가며 많은 걸 생각해보려 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