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진 못해도 드라마의 명성은 누구나가 들어 보았을 넷플릭스의 복수극 ‘더 글로리’를 차일피일 미뤄두다 지난 주말에 정주행 했다. 시청하는 내내 주인공 문동은이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극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수긍이 갔다. 아마도 혼탁하고 부정한 사회상 속에 불의에 대한 주인공의 대담한 응징에서 많은 이들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힘든 복수의 방법들로 채워진 드라마 설정이지만 픽션의 당위성에 어깃장을 놓는 건 합당치 않다. 다만 가해자들에 대한 살인을 교사하고 폭력을 종용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현실에서는 엄연한 불법임은 자명하다. 현행법상 정당방위는 매우 제한적이며 자력구제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사적 복수에 대한 시시비비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끼어들 틈이 없다. 때론 복잡하고 기나긴 법 절차보다는 ‘눈에는 눈’의 사자성어 이안환안(以眼還眼)의 심정으로 폭력의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을 확실한 정의의 실현으로 여기는 대중심리의 발로일 것이다. 나아가 시청자들은 가해자의 존재와 피해자가 명백한데도 가해자인 아들의 대학 입시를 위해 '끝장 소송'에 나서는 실존하는 어느 부모의 항간의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드라마 속 가해학생의 부모가 보인 빗나간 자식 사랑은 '자식이 괴물이 되면 부모는 악마가 된다'라는 것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니 분노의 타이밍도 절묘하다.몇 해 전 한국 사회 정의 열풍을 불러왔던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론을 굳이 이번 지면에 소환하지 않아도 시대상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물 흐르듯 변해왔다.
하지만 변치 않는 인간 공동체 응징의 원칙은 사인 간의 사적 제재의 배격이다. 이를 좌시하면 자칫 국가의 무용론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사회적 규율을 허물어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 속, 사적 복수에 대중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는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의 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드라마는 상반된 속성의 소재들을 메타포로 적절하게 활용한다. 주인공 동은의 조력자들이 등장할 때 ‘천사의 나팔꽃’과 ‘악마의 나팔꽃’,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이 그렇다.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과거의 폭력과 현재의 복수에 정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시청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느꼈던 불편한 진실이지만 학교폭력 가해자를 응징하는 복수극은 드라마 소재로서는 흥미로우나 피해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넘어 서기 힘들며 끝나지 않을 고난의 길이다. 그 과정은 가족 모두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드라마 속 문동은도 또 다른 피해 학생들도 그랬다.
학교폭력에 대한 교육당국과 수사당국의 판단 잣대가 보편적 상식의 대열에서 매우 굴곡져 있다는 생각이 대다수라면 , 만인에게 평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법치주의 근간이 이미 형평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라면 사적 복수는 드라마 속 가상의 이야기에서 현존하는 이야기로 스멀스멀 등장할 것이다. 그리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폭력으로 점철된 야만의 사회로 일그러져 갈 것이다. 매우 옳지 않다. 위법적인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피해자에게 외면된 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공감이 ‘더 글로리’의 흥행을 가져왔다면 이제 드라마로 끝나지 않을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 법치주의는 더디고 불편해도 공정하며 정의롭다는 보편적 생각들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며 우리 모두에게 확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 공정과 정의의 시스템을 향한 변화가 ‘더 글로리’의 열풍 속에 다시금 시작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