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함께 대응” 공고문도 ‘보기 싫다’ 떼 가…두 번 우는 피해자

“전세사기 함께 대응” 공고문도 ‘보기 싫다’ 떼 가…두 번 우는 피해자

전세사기 피해자 인터뷰
‘건축왕’ 피해자…석달 새 네 명 극단적 선택
대처법 담긴 공고문 붙여도 번번이 훼손
소송, 시위, 재판에 사라진 일상
“피해자 빠진 특별법…당장 떠나고 싶지만 낙찰이 최선”

기사승인 2023-05-31 06:05:01
지난 24일 극단적 선택을 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가 거주하던 아파트.   사진=정진용 기자

전세사기 특별법이 지난 2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최우선 변제금을 받지 못하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최대 10년간 무이자 대출해주는 내용이 골자다. 주택구입을 희망하는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주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2년 한시법이다. 피해자들이 요구한 공공이 전세보증금 채권을 매입하는 방안은 끝내 빠졌다.

통과 하루 전인 24일, 인천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석 달 새 네 번째다. A씨는 인천 대규모 전세사기 피의자, 일명 ‘건축왕’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살던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지난달 한 차례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아파트 관리비와 각종 세금을 수개월째 내지 못한 상태였다. 경찰에 전세사기 피해 신고도 하지 못했다. 

기자는 A씨 이웃이자 또다른 건축왕 피해자인 아파트 부대표 정모(41)씨를 지난 26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해당 아파트는 2개동 총 140세대 규모다. 이 중 80%에 해당하는 113세대가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매로 매각돼 쫓겨나다시피 나간 세대만 20여 가구. 이따금 드나드는 주민이 있을 뿐 아파트는 고요했다.

정씨 아파트 채권은 한 대부업체로 넘어갔다. 현재는 경매가 중단된 상태다. 정씨가 등기부등본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대통령 지시에도 경매 계속…일상도, 자녀계획도 ‘물거품’

지난해 9월 집주인으로부터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갈 수 있다는 문자 한 통을 받은 게 시작이었다. 부모님이 보태준 돈과 맞벌이로 모은 전세 보증금 7300만원은 부부의 전 재산이었다. 아내가 신축이라며 참 좋아했던, 부부의 세 번째 집은 악몽이 됐다.

건축설계사인 정씨는 밤새 도면을 그리고 전세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법을 공부했다. 미추홀구청, 경찰청, 법원을 다녔다. 대통령에게 편지도 보냈다. 잠이 부족한 날이 계속됐다. 경매사이트에 들어가 정씨 아파트가 포함된 경매 사건번호를 수시로 확인했다. 지난 1월 정씨는 고혈압 판정을 받았다. 결혼 10년 만에 아이를 가지기로 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18일 경매 유예·중단 지시를 한 뒤, 곧 해결책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정씨 사정을 알고 ‘마무리 하고 오라’며 4월 한 달간 무급휴가를 줬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경매는 계속됐다. 정씨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설상가상으로 정씨 아파트 채권은 한 대부업체로 넘어갔다. 경매 유예 조치는 어디까지나 금융권 ‘협조’ 사항이다. 정부가 강제할 수는 없다. 낙찰이 이뤄지면 정씨는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만 받고 당장 집을 비워줘야 할 상황이었다.

국토교통부에 문의했지만 ‘업무 과중으로 처리기간 연장’ 답변만 받았다. 대책위에서 대부업체 대표에 전화해 사정했다. 경매기일을 이틀 앞두고 간신히 경매를 중단시켰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임의 경매 통지서를 받았을 경우 대처방안이 적힌 공고문이 붙어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함께 대응” 공고문 붙여도 번번이 훼손

반쪽짜리 정부 대책만 문제가 아니다. 목소리를 모아 함께 대응하자며 주민이 아파트에 붙인 공고문 마저 번번이 훼손되며 피해자들을 두 번 울렸다. 

해당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에 붙은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공고문 외에는 피해 입은 세대가 다수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공고문에는 임의경매 통지를 받았을 경우, 고소장 접수 등 대처 방안과 아파트 임시 대표 개인 연락처가 적혔다. ‘그저 보기 안 좋다는 이유로 게시물을 제거하지 말아 달라’며 ‘무단 제거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경고도 담겼다.

정씨는 “처음에는 공고문이 보기 싫다며 떼어 달라는 주민이 많았다”면서 “친인척, 가족이 볼까봐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누군가 훼손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세대 현관도 예외가 아니다. 정씨는 수차례 현관문에 전세사기 피해를 알리는 스티커를 붙였지만 누군가가 이를 제거했다. 이 문제로 주민 간에 싸움이 나기도 했다. 아파트 출입구 외에는 내부에 CCTV 카메라도 설치돼있지 않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도 없다. 입주민들은 전세사기범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세대를 의심 중이다.

정씨는 “(숨진 피해자도)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을 보고 대책위에 전화 한 통이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며 “설마 단톡방에 안 계신 분 중에 사망자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며 씁쓸해 했다. 

아파트 외벽에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당장 떠나고 싶지만…손해 줄이려면 낙찰밖에는

전세사기 특별법은 피해자 목소리는 빠진 일방적 대책이라는 게 정씨 생각이다. 정씨는 정부가 보증금만 일부 반환해 준다면 긴급주거지원, 심리상담, 저리대출 등 각종 대책은 다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전세사기범에게 돈을 환수해 피해자에 돌려준다면 세금으로 선지급 해달라고 고집부릴 필요 없다. 그런데 나중에 범인 은닉재산 찾으면 국고로 환수할 거고, 지금 세금으로 보증금 돌려주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며 “피해자한테는 빚 또 내서 전세 들어가라고 하니 ‘정부가 우리를 상대로 금융사업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집을, 이 동네를 떠나고 싶다. 각종 하자 문제로 집주인과 씨름하고, 전세사기마저 당했다. 안 좋은 기억뿐이다. 하지만 정씨는 집을 경매에서 낙찰받아 살 계획이다. 가장 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정부가 마치 피해자들에게 ‘사기 당한 당신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과연 정치인들 본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런 반쪽짜리 대책 내놨을까요. 피해자는 더 늘어날거고 앞으로 특별법 수정·보완을 계속 요구하는 수밖에요.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쯤 올까요”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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